사진제공=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모델='밀레니엄 서울힐튼'의 곽용덕 대리)
《30대. 한 사회에서 30대는 허리다. 패기만만하나 경험이 부족한 20대를 이끌고, 연륜은 깊으나 서서히 추락해 가는 40대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급속도로 변하는 요즘 한국 사회에서 30대의 역할은 새롭게 정의되고 있는 중이다. ‘40대 임원시대’라는 말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매년 대기업 임원 인사에서 최연소 기록은 이제 30대의 몫이다. 기업의 조직은 갈수록 젊어지고 30대들이 조직의 중추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최고의 직장으로 꼽히는 컨설팅 펌이나 투자은행(IB)에선 30대가 핵심이다. 언론에 오르내리는 벤처기업인 가운데에도 30대가 수두룩하다.
하지만 30대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다. ‘38선(38세 정년)’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30대도 더 이상 안심할 수 없는 나이가 됐다. 입사한 지 10년 안팎의 30대 대리나 과장들도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해 갈 수 없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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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베이비 붐 세대
2004년 현재 한국의 30대는 65년부터 74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대학으로 치면 84학번에서 93학번까지다. 세대라는 것이 칼로 자르듯 나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다른 세대와 구별 짓게 하는 특징은 엄존한다.
70년을 전후해 태어난 이들은 ‘2차 베이비 붐 세대’로 불린다. 61년 가족계획이 실시되면서 줄어들던 출산율이 이 시기에 다시 늘면서 6·25전쟁 후에 이어 베이비 붐이 일었던 것.
오리콤 브랜드전략연구소 주은경 차장은 “이 시기에 태어난 이들은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자라 자기중심적인 특징이 있다”며 “동년배가 많은 만큼 살아남기 위한 경쟁도 치열한 세대”라고 설명했다.
조직의 나이가 젊어지면서 30대 임원도 늘고 있다. 하나로통신 최연소 임원인 서정식 상무가 직원들에게 변화를 위한 실천 방안을 설명하고 있다.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국내 자산운용 업계 최초의 30대 최고경영자로 꼽히는 이지형 맥쿼리IMM자산운용 대표(38)는 “지금 30대는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지면서 자신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모험도 감수하는 세대”라며 “특히 30대 초반은 승진과 자녀 교육, 재테크 등에 관심이 많다”고 평가했다.
경영컨설팅업체인 베인 & 컴퍼니의 박성훈 이사는 73년생으로 올해 31세다. 96년 이 회사에 들어와 거의 매년 승진을 거듭한 끝에 29세이던 2002년 이사에 올랐다. 현재 베인 & 컴퍼니 한국지사의 100여명 컨설턴트 가운데 임원은 그를 포함해 단 8명뿐이다. 그 흔한 해외 경영학석사(MBA) 학위도 없는 그가 이처럼 초고속 승진을 한 데 대해 주변에선 ‘열정’을 이유로 든다.
이 회사 신경자 팀장은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일이면 일, 무엇을 하든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는 게 박 이사의 장점”이라고 말한다. 그는 주말마다 밴드 활동도 하고 있다. 이 시대 튀는 30대 전문직 직장인의 전형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에 따르면 세대 규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경험’이다. 현재의 30대를 세대로 규정할 수 있는 경험은 무엇인가.
정치적으로 이들은 이른바 전형적인 386세대와는 유사하면서도 다른 경험을 갖고 있다. 80년대 광주 민주화 항쟁을 직접 겪은 세대가 아니다.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대학가에서 투쟁은 조금씩 시들해졌다. 이런 상황은 풍요롭게 자란 그들의 개인주의적인 성향과 맞물려 90년대 이후 영어 공부와 고시 열풍으로 이어졌다.
컴퓨터와 인터넷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3.0’이 미국에서 발표된 시점이 90년. 현재의 30대는 학창 시절이나 입사 초기에 직접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해본 첫 세대다. 이런 경험 역시 직장에서 그들을 차별화할 수 있는 요인이었다.
92년에는 ‘월드와이드웹(www)’ 개념이 등장했고 이듬해인 93년에는 한국에 첫 인터넷 사이트가 만들어졌다. 인터넷이 만들어낸 새로운 문화에 가장 먼저 적응한 것도 그들이다.
○ 뜨는 30대
올해 35세인 하나로통신의 서정식 변화관리실장(상무)은 이 회사의 최연소 임원이다. 91년 삼성물산에 입사해 컨설팅업체인 아서 D 리틀을 거쳐 지난해 하나로통신에 합류했다. 이 회사의 경영진은 하나로통신이라는 거대 조직의 혁신을 젊은 그의 손에 맡겼다.
인사 관행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은행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외환은행은 지난해 12월 김&장 법률사무소 김형민 위원을 커뮤니케이션 담당 상무로 영입했다. 당시 김 상무의 나이는 38세. 30대 임원이 탄생한 것은 외환은행은 물론 국내 시중은행에서 처음 있는 일로 꼽혔다.
올해 1월 국민은행 본부 부서장 인사에선 66년생 차장 2명이 최연소 본부 팀장으로 발탁됐다. 이성원 전략기획팀장은 미국에서 경영학석사(MBA)를 마친 맥킨지 컨설턴트 출신이고 인혜원 자산유동화팀장은 91년 석사 공채로 들어와 줄곧 자산유동화 분야에서 일한 전문가다. 지금까지 국민은행에선 40대 후반은 되어야 팀장이 되곤 했다.
기업들이 이처럼 젊은 인재를 발탁하는 이유는 뭘까. 20대나 40대가 아닌 30대만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지금 30대가 업무에서 컴퓨터를 활용하기 시작한 첫 세대라는 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들에게 인터넷과 컴퓨터가 업무의 메인 인프라로 자리 잡은 것은 축복이다.
하나로통신 서 상무는 “90년대 초반만 해도 기업에선 품의서 기안 작업을 손으로 했다”며 “40대 이상은 초급 관리자가 될 때까지 PC가 없는 환경에서 일한 세대”라고 회고했다.
베인 & 컴퍼니의 박 이사는 인터넷과 정보기술(IT) 자체가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어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70년대에 종합상사와 건설업계 출신이 잘 나갔던 것처럼 90년대 들어 인터넷 바람이 불면서 30대 벤처기업가들이 사회 전면에 나서게 됐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기업마다 경험보다는 창의력을 중시하는 분위기다. 앞 다퉈 지식경영시스템(KMS)이 도입되면서 경험과 지식이 고참의 머리가 아니라 회사 내부의 데이터베이스에 축적되고 있다. 톡톡 튀는 발상의 전환이 오히려 개인의 경쟁력이 되는 시점이다.
○ 그늘, 그리고 새로운 도전
30대에게 늘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기업들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자발적이건 비자발적이건 퇴직 연령이 30대까지 떨어졌다.
두산중공업은 지난해 11월 대리급 이하 사무직 170명의 명예퇴직 신청을 받았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36세. 이 회사에선 9월에도 과장급 170여명이 회사를 떠났다. KT에서 명예퇴직한 5500여명 가운데 532명이 30대였다. 투신업계에서도 30대의 퇴직이 이어졌다.
나이순으로 내보내는 게 아니라 전 직급에 걸쳐 고르게 인원을 줄이는 서구형 시스템이 정착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계급 정년’이다.
임원이 젊어진다는 것은 일반 샐러리맨들에겐 스트레스다. 삼성이나 LG 같은 대기업에서 임원이 되는 평균 나이는 40대 초중반까지 떨어졌다. ‘핵심 인재’다 뭐다해서 직원에 품계를 매겨 관리하고 있다. 늦어도 30대 후반이면 이미 임원이 될 수 있을지 여부가 결정된다.
삼성전자 인사팀 관계자는 “임원이 되기 전까지 본인에게 알려주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고참 과장 정도면 자신의 가능성을 대충 알게 된다”고 말했다.
LG경제연구소 이지평 연구위원은 “조기에 발탁된 인재들은 조직에 충성심을 갖게 되겠지만 나머지 평범한 직원들은 오히려 충성심이 떨어지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일부에선 ‘38선’이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40대가 되면 이미 삶의 행로에 대한 전면적인 궤도 수정은 어렵다는 것이다.
대기업을 다니던 최정곤씨(가명·33)는 지난해 회사를 그만두고 약대 진학을 위해 수능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최씨는 “회사에서 수시로 명예퇴직 신청을 받는 등 희망이 보이지 않아 과감하게 나왔다”고 말했다. 서울 시내의 학원가에선 최씨처럼 의대나 한의대, 약대 등을 목표로 공부하는 30대 수능 준비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소자본 창업을 위해 컨설팅업체를 찾는 30대도 크게 늘고 있다.
경력관리 전문업체인 스카우트의 김현섭 사장은 “직장의 라이프 사이클이 점점 짧아지는 상황에서 30대에 어떤 준비를 하느냐에 따라 40, 50대의 삶이 달라진다”며 “외국어 능력은 기본이고 업무의 전문성과 네트워크를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이 서른에 느끼는 공허함을 노래한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단편 ‘삼십세’는 이렇게 끝난다. ‘일어서서 걸으라, 그대의 뼈는 결코 부러지지 않았으니.’
글=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사진=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모델=‘밀레니엄 서울힐튼’의 곽용덕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