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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구기자의 현장체험]홈쇼핑서 먹는 모델 체험

입력 | 2004-03-11 16:40:00

음식물을 판매하는 홈쇼핑 채널의 모델들은 서로 데면데면하게 앉아 있다가도 카메라만 돌아오면 세상에서 가장 화목한 가족, 가장 맛있는 음식을 처음 맛보는 듯한 태도로 돌변해야 한다.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집에서 뒹굴고 있던 일요일. 뭔가 볼 게 있을까 싶어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다. 재탕, 삼탕의 프로그램들. ‘쥬라기 공원’은 벌써 5번쯤 본 것 같다.

앞뒤로 돌리던 리모컨 버튼이 한 곳에서 멈춘다. 홈쇼핑 채널이다!

즐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심야에 속옷을 판매할 때에는 꽤 자주 본 것 같다. 단일 시간 시청률을 따진다면 ‘실미도’를 능가하지 않을까.

조금 지나자 상품이 바뀐다. 음식, 가구, 옷, 보험…. 중국 사람들이 책상만 빼고 네발 달린 것은 다 먹는다는 말이 있듯 홈쇼핑에서는 아마 시간이 더 지나면 사람만 빼고 다 사고 팔지도 모른다.

판매용 상품을 입고 먹고 쓰며 연기하는 모델들을 한참 보고 있자니 (사실 내겐 상품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엉뚱한 생각이 든다. ‘대사가 들리지도 않는데 무슨 말을 저렇게 할까?’, ‘상품이 좋다는 것을 어떻게 연기로 표현하지?’

대사 없는 연기자들, 너무 예뻐서 상품보다 돋보이면 안 되는 그들의 세계. LG 홈쇼핑의 도움으로 홈쇼핑 모델을 체험했다.

○ ‘고등어 먹기’만 10분

홈쇼핑 채널의 상품군은 크게 음식, 패션, 가전·가구 등으로 나뉜다. 패션은 길이가 모자라고 가전·가구는 모델의 우아한 이미지가 필수적이라 안 된단다. 결국 음식으로 결정하고 이리저리 재보다 이 회사 주력상품 중의 하나인 ‘밥 고래 고등어’로 낙찰됐다.

방송시간은 1시간여. 실제 연기 시간은 10여분이다. ‘아주’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된다는 설명.

3시간 전에 스튜디오 도착. 분장과 의상을 갈아입고 회의에 참석. PD, 쇼핑 호스트, 모델, 스태프들이 모여 방송 직전의 주의사항, 상품과 방송 포인트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밥 고래∼’의 포인트는 △손질이 다 돼 따로 씻거나 간을 맞출 필요가 없으며 △뼈까지 발라져 있어 먹기 편하고 △직거래로 저렴하다는 점이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먹는 오버 액션을 취해본다. ‘아무래도 어색해….’

홈쇼핑 상품 판매는 대부분 생방송. 매 방송 목표액이 책정돼 있고, 얼마나 팔리고 있는지 시시각각으로 체크된다. 모델 때문에 매출이 줄었다는 말을 들으면 안 되는데…. 부담감이 밀려온다.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떨었을 올랜도 블룸이 생각났다.

시작 전 회의실에서 쇼핑 호스트 백모양과 인사를 나눴다.

예쁘다…. 갑자기 좋은 연기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샘솟았다.

○ Stand By… On Air…

식탁에 앉았다. 기자가 남편역할을 맡은 부부와 아들, 할아버지의 4인 가족상. 모두 경력 2∼11년차인 연기자들이다. 식탁 위에는 고등어찌개, 고등어구이, 고등어 양념구이와 사은품인 갈치, 굴비 구이들이 차려져 있다.

촬영할 장면은 전체 식사 장면과 개인별 먹는 모습. 스태프가 옆에서 신호를 하면 그때부터 ‘맛있게’ 먹어야 한다.

‘맛있게’라 함은 가능한 한 음식을 듬뿍 떠서, 입을 크게 벌리고 먹으며,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감탄을 하는 식이다.

또 전부 다 찌개에 숟가락을 넣고 있다가 신호가 떨어지면 일제히 함께 떠먹은 뒤 “크∼”소리와 함께 정말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어야 한다.

말은 쉬운데 언제 그러고 살아봤나. 무서운 것은 옆에 앉은 베테랑들. 무표정하게 묻는 말에만 대답하던 ‘선배’님들은 카메라가 돌아오자마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족으로 돌변했다.

“정말 맛있네” “아버님 이거 드셔보세요” “아∼”.

고등어구이를 한 젓가락 듬뿍 집어 입에 넣어주는 아내. 누가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했나.

일주일 전 같은 프로그램을 참고삼아 봤을 때는 간단히 끝나던 먹는 장면이 오늘은 자주 돌아온다.

“전체 샷!” “할아버지(샷)!” “아빠!” “아내!” “다시 아빠!” “아들!” “또 아빠!”

카메라가 돌아올 때마다 고등어 한 움큼씩을 입에 넣어야 하는 나. 고등어로 입이 미어졌다.

급기야 펄펄 끓는 찌개를 듬뿍 떠먹고 입천장을 데었다. 하지만 웃어야 했다. ‘엄지손가락’을 휘날리며∼.

시간이 지나면서 연기에 물이 올랐다. 고등어구이를 왕창 뜯어 ‘아내’에게 웃으며 먹여줬다. 예정에도 없던 애드리브다.

‘너도 당해봐라.’

주변에서 한 스태프가 말한다. “저런 고난도의 무공을….”

참고로 홈쇼핑에선 엄마나 아빠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애들에게 음식을 듬뿍 떠 먹여주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배는 부르고 먹는 연기는 해야 할 때 모델들이 가끔 쓰는 방법이라고 한다.

애들이 불쌍하다….

○ 그들만의 리그

홈쇼핑 모델은 너무 예쁘면 안 된단다. 상품보다 더 주목을 받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연기 장면이 간단해 돋보이려면 오히려 더 많은 아이디어와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경쟁 업체의 같은 상품 연기보다 나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대사는 안 나오지만 입 모양이 연기 장면과 동떨어지면 시청자가 알아차리기 때문에 가능한 한 상황에 맞는 말을 실제로 하게 된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그냥 “어쩌구어쩌구”라고 입만 벌리는 경우도 있단다.

대부분 생방송이라서 웃지 못할 일도 가끔 발생한다. 한번은 칼이 잘 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음식을 자르다가 쇼핑 호스트가 손을 벤 적도 있다고 한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중에 계속된 방송. 방향은 달랐지만 아무튼 칼이 정말 잘 든다는 것을 보여주기는 한 것 같다.

형식적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도 이날 방송은 그럭저럭 괜찮았나보다. 끝나자마자 서로 수고했다고 인사를 나눈다. 옆에 서있던 회사 직원이 “다행히 목표액은 넘었다”고 알려줬다.

‘다행히?’

그런데 식당에서 옆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던 담당 PD는 왜 아는 척도 안하고 휙 가버렸을까.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