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총선 결과를 자신에 대한 재신임과 연계하겠다는 입장을 확실히 했다. 그러나 이는 5개월간 계속된 재신임 논란을 잠재우는 해법이 되기는커녕 탄핵 정국과 맞물려 정치적 소모전을 더 확산시킬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무엇보다 헌법 왜곡이다. 사실상 위헌 판결을 받은 국민투표 방식과 마찬가지다.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 결과를 놓고 대통령의 진퇴를 결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헌법 어느 구석에도 그런 조항이 없다. 총선이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을 띠는 것은 사실이지만 헌법에 보장된 대통령 임기까지 좌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당장 재신임 불신임의 기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는 시기쯤에 명확하게 조건과 결과를 밝히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기준을 정하더라도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개헌 저지선(100석)일 수도 있고 과반수 의석(150석)일 수도 있다. 열린우리당의 일정 득표율을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런 일방적 기준을 야권이 수용할 리 없다. 총선 결과 제시한 기준을 넘어 스스로 재신임을 받았다고 판단한다 해도 두고두고 후유증이 계속될 것이다. 야당이 재신임을 인정하지 않는 마당에 국정인들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국민통합의 축제여야 할 선거가 국정 혼란의 불씨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노 대통령 회견 후 야권이 크게 반발하면서 국정의 불가측성(不可測性)은 더욱 높아지는 상황이다.
노 대통령의 발언은 국민에게 열린우리당 후보를 많이 뽑아야 한다는 일종의 대(對)국민 압박으로 비칠 수도 있다. 기준에 못 미치면 결국 대통령은 물러나야 하고 국가적 혼란이 올 것이라는 위기감을 국민에게 심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노 대통령은 국민의 불안감을 이용해 사실상 선거운동을 한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대통령의 선거 관련 발언으로 탄핵안까지 제출된 상태에서 반성이나 사과는 없이 더욱 노골적으로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재신임 선언은 노 대통령 자신의 측근 비리 의혹에서 비롯됐다. ‘10분의 1’ 발언도 노 캠프의 불법 대선자금 문제가 발단이다. 이후 검찰 수사 결과 측근 비리가 줄줄이 드러났고, 불법 자금도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어섰다. 그런데도 비리 연루자를 장황하게 변호하고 자신의 기준으로 보면 ‘10분의 1’이 안 된다며 이를 오히려 여당의 선거전략으로 활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그런 모순이 없다. 노 대통령은 총선 재신임 연계 입장을 거둬들이는 게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