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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마당]김창호/문화정책 ‘문배울 사람들’께 배워라

입력 | 2004-03-11 19:22:00


노무현 정권 출범 후 토론이 활성화됐다고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이전부터 시민사회, 지역사회 중심의 토론문화 속에서 살아 왔다. 그러던 것이 현 정부에서 전업운동가들이 정부로 이직하면서 관과 정부의 목소리가 커진 것으로 이해된다. 문화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자신들의 전유물이고, 자기들이 국민을 계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고체계 속에서 말이다.

얼마 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미술관에서 열린 ‘참여정부 문화비전 수립을 위한 공개 워크숍’에 참석했다. 그러나 워크숍 참가자들은 지금 지역과 농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동적인 문화현상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문화비전을 세운다고 하니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이 나오는 게 당연할 것이다.

우리나라 행정체계상 가장 작은 단위지역공동체인 어느 반(班)의 사례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경기 포천시 소흘읍 직동2리 1반 주민인 신동욱, 이찬우씨는 마을 한가운데로 흐르는 문배개울에 물고기가 사라지고, 마을 곳곳에 있던 문배나무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을 안타까워 하다가 마을의 전통문화를 지키는 문화공동체 결성을 추진하게 됐다.

이 마을은 서기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이 일대를 점령한 뒤 쌓았다고 전하는 고리 산성 내에 있는 유서 깊은 동네다. 하지만 지방정부가 이곳을 문화의 거리로 지정하고 무분별하게 허가해준 카페와 식당 등에서 배출하는 오폐수로 개울이 오염되고 마을의 문화정체성도 상실 위기를 맞았다.

2월 21일 창립대회를 가진 ‘문배울 사람들’은 이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자각에서 출발했다. 신동욱 회장과 뜻을 같이하는 동네 선후배들로 구성된 ‘문배울 사람들’은 우선 문배나무와 문배개울을 살려나가면서 장기적으로 마을에 문화관을 세우고, 문배개울가에 조각공원을 조성해 마을 전체를 문화·생태박물관으로 만들고, 사생대회 백일장 등 문화축제도 열기로 했다.

어디 ‘문배울 사람들’뿐이겠는가. 전국 곳곳에서 문화정체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발적인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각 지역과 농촌에서 주민들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문화비전보다 정부의 문화정책 추진 속도가 느리다는 데에 있다.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문화적 토대 구축을 위해서는 정부 스스로 문화정책의 지체를 극복해야 한다.

국민 대다수의 보편적인 가치관과 현 정부의 문화적 시각이 충돌해 아노미 현상을 빚어내고 있는 데 대한 성찰도 필요하다. 예전에 농산어촌은 그 자체만으로 문화적인 특색이 있었다. 초가지붕 위의 호박덩굴, 군불 때는 아궁이, 외양간의 황소, 화롯가의 군밤 군고구마, 그리고 옛날이야기 등을 앗아간 장본인은 바로 정부 아니던가. 새삼 농촌 지역의 문화격차를 해소한다고 하면서 시골을 또 하나의 ‘성냥갑 도시’로 만드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국가균형발전의 문화적 토대 구축’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농산어촌 사람들을 계몽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문화인으로 인정해 정부정책 결정에 참여시키고 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지키고 가꾸어 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김창호 포천문인협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