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의 위력이 국가의 운명과 국민의 팔자를 가르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들은 ‘노무현 48.9%, 이회창 46.6%’라는 답안지를 냈다. 이 숫자는 ‘노무현 코드’로 생명력을 얻어 국민의 행복과 불행, 나라의 오늘과 내일을 마름질했다. 대선 25일 전 반(反)이회창 후보단일화를 위한 2000명 샘플의 여론조사에서 나온 ‘노무현 46.8%, 정몽준 42.2%’라는 숫자는 결국 국운(國運)의 화살표가 됐다.
▼憲裁9인의 역사적 짐 ▼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의원 71.2%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이번엔 이 숫자가 국민을 갈림길에 세우고 있다. 제1야당 후보를 2.3%포인트 차로 누르고 국운의 최고설계자가 된 노 대통령이 계속 동행하자는 길, 탄핵안 가결선을 4.5%포인트 넘겨 채워 대통령을 중도 하차시키려는 야당들이 바꿔 가자는 길….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헌법재판관 9명이 역사적 선택의 짐을 졌다. 윤영철 송인준 주선회 김영일 김경일 전효숙 권성 김효종 이상경…. 국민은 이들이 만들어 내는 심판의 숫자에 따라 어디론가 가야 한다.
식물대통령을 원상회복시켜 다시 함께 가는 것이 덜 박복할지, 지난 1년은 버린 셈 치고 새로운 4년을 준비하는 것이 덜 불행할지 민심은 방황하고 있다.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20∼30%까지 추락했지만 탄핵안이 가결되자 60∼70%가 잘못됐다고 반응했다. 하지만 ‘노짱 구하기’ 시위가 광기(狂氣)에 휩싸이고, 권한 정지된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이를 부추기는 조짐이 뚜렷해지면 민심이 다시 등을 돌릴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헌법재판관들이 여론시위와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점이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은 헌법을 지켜냄으로써 국기(國基)를 바로 세우고, 법치를 뿌리내려야 한다는 요구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 지금처럼 법이 무너지고는 다수 국민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도, 미래를 예측할 수도, 땀 흘린 만큼 행복해질 수도 없다.
헌법재판관들은 고도의 전문성과 헌법기관으로서의 투철한 소명의식으로 대통령에 대해서나, 야당들에 대해서나, 국민에 대해서나 법 적용의 엄정함을 보여 줘야 한다. 이에 따라 심판이 내려지면 어떤 답이 됐건 대통령도 야당도 국민도 깨끗이 승복해야 한다. 이러는 것이 대통령의 임기 지속 여부에 따른 국운의 길흉을 넘어서 법 안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를 만드는 길이다.
총선은 헌재의 심판과 별개다. 심판은 재판관들에게 맡기고 유권자들은 자신의 ‘2표’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해야 한다. 어느 당과 후보에 표를 찍는 것이 나의 팔자와 나라의 내일을 기약하는 길이 될지 정말 심사숙고해야 한다. 이것은 결혼상대 고르기나 자식 혼처 정하기보다 훨씬 중요할 수 있다.
어떤 대통령을 뽑았더니 나와 나라의 처지가 어떻게 됐고, 어느 정당을 지지했더니 세상이 어떻게 됐는지 되새김해 볼 필요도 있다. 무엇보다 이번에 어느 당이 다수당이 되면 어떤 정치를 하고 어떤 법을 만들지, 누구를 당선시키면 어떤 행동을 할지 몇 번이라도 생각해 봐야 한다. 연기(演技)와 술수와 날림 공약에 속아 넘어가선 안 된다.
▼나와 나라의 미래 가르 2표 ▼
투표날인 4월 15일 오후 6시까지는 유권자 천국일지 모르지만, 그 이후엔 의석분포라는 숫자의 힘 앞에서 땅을 치며 후회할지 모른다. 결국 국민의 팔자는 스스로 만든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어떤 당이 얼마나 큰 다수당이 되고, 제2당은 어느 당이 되느냐 하는 것은 일자리 걱정 덜하고 잘살기, 더 신나고 행복해지기, 어린 아들 딸에게 좋은 나라 물려주기 등에 직결된다. 또 이번 총선은 노 대통령이라는 존재에 대한 유권자의 판단을 요구하는 국면이 돼 버렸다.
유권자 선택의 총합(總合)이 만들어 내는 숫자들에 많은 것이 걸려 있다. ‘뜨거운 가슴’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가 필요하다. 충동구매는 소비자 책임이다. 30일 남았다.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