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면 상처는 아무는 법. 이제는 옛일을 말할 수 있겠다.
1999년 6월 열렸던 숍 라이트 클래식 대회의 우승컵은 박세리가 1998년 5월 맥도널드 LPGA 우승 이후 13개월 만에 안아본 우승배였다. 박세리는 이어 열린 LPGA US오픈에서는 타이틀 방어에 실패했지만, 7월에 열린 제이미파 크로거 클래식에서 1승을 보태 슬럼프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시즌 막판 불같은 뚝심을 선보이며 전해에 이어 99년에도 4승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특히 제이미파 클래식 우승은 값진 훈장이었다. 마지막 날 무려 6명의 골퍼가 동타 선두를 기록, 사상 최다 선수 연장전이라는 난전 끝에 얻어낸 승리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98년 5월부터 99년 6월까지 우리가 박세리를 대했던 태도다. 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 2년차 징크스, 집중력 상실, 피로의 누적과 체력 저하, 헝그리 정신의 결여, 심지어 남자문제가 부진의 이유였다고 한다. 다 맞는 말이라고 치자. 그러나 누구 하나 박세리가 느꼈을 엄청난 중압감을 헤아려본 사람이 있는가. 우리 언론이나 국민의 기대수준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높았다는 생각을 해본 일은 없는가. 컷오프에 걸리면 우리는 박세리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외국에서는 일류들의 예선탈락에 대해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골프라는 종목의 특성상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박세리 스스로 부담스러워했다는 ‘골프여왕’ 칭호도 문제였다. 데뷔 첫해 경이적인 성적을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칭호는 장구한 세월 정상에서 밀려나지 않으면서 절정의 기량을 보인 골퍼에게나 합당한 훈장이다. 세계가 박세리를 주목했던 까닭은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 때문이지 여자골프계를 평정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국 언론이 데뷔 1년차 신인에게 붙여준 여왕이라는 칭호는 혹 부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국민적 결의가 아니었는지. 어떤 종목이든 진정한 여왕의 탄생을 위해서는 중압감의 사슬로부터 선수들을 하루빨리 풀어줘야 한다. 초년병 시절의 성취에 대한 과도한 찬사와 기대는 어린 선수의 잠재력을 갉아먹고 끝내는 선수 수명을 단축시키는 멍에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70년대 초반 역도의 인상 용상 추상 등 전 종목 주니어 세계신기록 보유자였던 원신희. 84년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5관왕 에릭 하이든을 언제나 능가했던 주니어 시절의 이영하. 80년 전영오픈 배드민턴 여자단식을 석권한 뒤 배드민턴 협회가 조직한 세계제패 기념 시범경기에 응해 휴식도 없이 전국을 돌며 경기를 벌이다 탈진해 20세의 나이로 선수생명을 마감한 황선애. 한때 힝기스의 숙적이던 95년 윔블던 여자단식 주니어부 준우승자 전미라….
여기에 또 다른 이름을 덧붙이고 싶지 않다. 시행착오는 한 번으로 족하다. 박세리는 한국이 내세울 가장 훌륭한 문화상품 가운데 하나다. 걸맞게 대우해주고, 어떻게 이용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가를 전략적 차원에서 모색해야 한다. 운동선수라는 상품은 단기간 내에 만들 수 없으며, 소질과 노력과 운이 결합된 정상급의 재목은 그야말로 어쩌다 출현할 뿐이다. 보수 관리만 잘되면 20년 이상 갈 상품을 2∼3년 만에 폐기하는 일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다.
장원재 숭실대 교수·문예창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