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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이강운/‘랩어카운트’ 파는게 능사 아니다

입력 | 2004-03-16 18:48:00


1999년 주식형펀드 붐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씨티은행 서울지점은 미국계 자산운용사 T사와 재벌계 운용사인 S사가 각각 운용하는 주식형펀드를 팔았다. 판매 초기에는 국내 운용사의 펀드 실적이 월등했다. 정보기술(IT) 붐에 편승한 종목들을 많이 편입했기 때문이다. 외국사 펀드에 가입한 고객들의 항의가 잇따랐다.

은행측에선 T사 펀드의 판매 중단 여부를 놓고 고민했다. 그러나 씨티은행 판매담당자의 생각은 달랐다. “운용사의 운용철학과 시스템을 믿고 상품판매를 결정한 것인데 수익률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 판매를 중단할 수 없다.”

결국 IT 버블이 꺼지면서 수익률은 역전됐고 외국 운용사의 펀드는 대성공했다.

2003년 초의 일이다. 일본에 있는 미국계 운용사 관계자가 한국의 펀드판매 현황을 둘러보기 위해 방한했다. 이 관계자는 대단히 실망했다. 그가 한국의 펀드판매 시장에 대해 내린 평가는 매우 신랄했다. “고객에게 원금보장 등 책임지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팔면 끝’이라는 생각은 나중에 큰 화(禍)를 부른다.”

한 전환증권사 L차장이 귀띔한 주식브로커 업무방식도 신선하다. 그는 고객에게 종목을 추천할 때 투자리스크를 ‘귀가 따갑도록’ 반복했다고 한다. 투자종목을 권해 매매를 성사시켜야 하는 주식브로커가 ‘투자위험’을 강조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 하지만 L차장의 이런 영업전략은 주가 급락기에 주효했다. 그의 고객은 손해를 덜 봤고 손해를 보더라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세 가지 케이스는 모두 증시의 최일선에서 고객을 만나는 ‘증권맨’들에 대한 이야기다. 운용성적이 좋아야 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선 판매자의 책임감과 도덕성이 간접투자상품 정착에 더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최근 증권사 랩어카운트 상품이 잘 팔리고 있지만 2000년 ‘바이 코리아’의 후유증이 떠오르는 것은 필자만의 기우(杞憂)일까.

이강운 기자 kwoon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