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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신지호/20세기에 갇힌 한국정치

입력 | 2004-03-16 19:04:00


20세기의 망령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아니 우리 스스로가 20세기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 탄핵을 ‘5공 후예들에 의한 의회 쿠데타’로 규정한 열린우리당의 정동영 의장은 이번 총선이 민주 대 반민주 구도로 치러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문민대통령이 등장한 지 10년이 넘었건만 여당 지도자의 언어는 아직도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 한나라당 역시 마찬가지다. 최병렬 대표는 노무현 정권을 친북좌익세력이라고 규정했고 이번 탄핵을 ‘구국의 결단’으로 치켜세웠다. 마치 70년대 수사(修辭)법을 보는 듯하다.

▼시대정신 읽지 못한 리더십 ▼

양비론을 펼치려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세기가 열린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건만 여전히 20세기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정치를 되새겨보기 위해서다.

경제성장과 민주화. 이 둘은 모든 개발도상국의 지상과제였다. 한국만큼 이 두 과제를 성공적으로 이뤄낸 나라는 드물다. 지금은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한강의 기적’을 배우고자 열심히 노력했다. 민주화 역시 마찬가지다. 70, 80년대 한국의 반독재투쟁은 제3세계 민주화운동의 전범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경제는 ‘국민소득 1만달러의 덫’에 걸려 신음하고 있으며 민주화 이후의 한국민주주의는 포퓰리즘의 늪에 빠져 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나는 그 일차적 원인을 시대정신을 읽지 못한 리더십에서 찾고 싶다.

새로운 세기 우리의 국가목표는 선진화여야 한다. 선진화는 산업화(正)와 민주화(反)를 뛰어넘는 합(合)의 개념이다. 2만달러 고지는 저임금 노동력을 쥐어짜는 개발독재 방식으로는 결코 점령할 수 없으며 건강한 엘리트 육성 없는 권력의 하향화만으로는 결코 민주주의의 성숙을 이뤄낼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은 구시대의 감각과 상상력으로 21세기를 이끌고 있다. 현존하는 정치세력 중 선진화의 시대적 사명을 정확히 자각하고 있는 집단은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야 공히 과거를 먹고 살고 있다. 심지어 21세기 문명조차 20세기적으로 이용한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 가자”고 우리는 10년 전에 외쳤다. 그 결과 인터넷 강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런데 21세기 전자민주주의의 새로운 모형을 창출해 나가는 데 소중한 도구로 쓰여야 할 디지털문화가 포퓰리즘의 무기로 전락해 버렸고 이 기이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인터넷 포퓰리즘’이란 한국 특유의 신조어마저 탄생했다. 이렇듯 한국의 21세기는 20세기에 농락당하고 있다. 이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20세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비단 정치인만이 아니다. 일반 민초들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다. 부정부패라는 우리 사회의 적폐(積弊)가 항상 최대의 정치 쟁점으로 부각되면서 민초들의 정치의식을 제한된 공간으로 몰아넣었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지금, 나라의 선진화를 위한 선택이 행동기준이 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21세기형 정치’는 언제쯤 ▼

그렇다면 언제쯤 21세기 정치가 찾아올 것인가. 질풍노도와 같은 현재의 민심이 자신들이 소망했던 정치를 충분히 경험하고 난 다음이 될 것이다. 성장 없이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분배 개선이 힘들며 제대로 된 엘리트 없이는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국가운영이 곤란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 후라야 한다. 지금처럼 ‘좋은 학교’ 나온 사람이 질시의 대상이 되는 분위기에서 선진화를 향한 본격 진군은 어렵다.

압축성장은 한국경제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그 부정적 유산으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에 빠져 있으며 선진화라는 시대적 과제수행은 지연되고 있다. 이제 내후년이면 ‘잃어버린 10년’이 우리의 현실이 될지 모른다. 그리고 뒤늦은 선진화는 우리에게 또 압축선진화를 위한 땀과 눈물을 요구할지 모른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