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현장 2004]車업계 ‘밀어내기’ 극심…주문안한 신차 팔라니

입력 | 2004-03-16 19:10:00

국내 내수경기가 위축되면서 자동차업계의 ‘밀어내기’가 다시 심해지고 있다. 12일 서울 시내 한 대형 주차장에 번호판을 달지 않은 새 차 30여대가 주차돼 있다. 전영한기자


《12일 경기 고양시 덕양구의 한 실외 차고(車庫). 번호판도 없는 새 차 100여대가 세워져 있었다. 잔뜩 얼룩진 유리창 밑으로는 ‘남대문 112’, ‘미아 142’ 등의 표시가 적힌 종이가 보였다. 이 가운데 A사 승용차의 차대번호를 확인한 결과 2월 초 J씨 이름으로 출고된 차였다. 같은 날 오후 서울 시내의 한 대형 주차장. ‘일반 차량은 지하 4층 출입금지’라는 푯말 뒤로 번호판을 달지 않은 새 차 30여대가 주차돼 있었다. 관리인은 “영업사원들이 밀어내기를 한 차인데 수십만원 싸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자동차업계의 재고가 외환위기 이후 최고 수준에 이르면서 선(先) 출고, 이른바 ‘밀어내기’가 심해지고 있다. 내수경기가 위축되면서 문제가 되는 것. 자동차대리점 사장인 J씨는 “올 들어 본사의 판매 요청이 지난해의 2배로 늘었다”며 “해외 재고까지 늘어 압력이 더 심해질 것 같다”고 걱정했다.》

▽고조되는 영업현장의 불만=주문이 없는데 판매된 것처럼 매출을 일으키는 밀어내기는 주로 월말에 이뤄진다. 업체들이 말일을 기준으로 매월 판매대수를 공개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L사장은 “2월 29일 회사로부터 중형차, 1t 트럭 등 한 달 판매량의 10%에 이르는 4대를 팔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2대만 처리했다”고 말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일부 차종의 말일 판매대수가 2월 전체 판매량의 20%에 이르렀다”고 귀띔했다.

직영점과 대리점 등 현장의 불만도 높아지고 있다.

현대자동차 노조 관계자는 “2월 중순 회사측에 판매압력을 줄여 달라고 건의했다”고 밝혔다.

이 회사 대리점협의회장은 2월 마지막 주 단식 시위를 벌였고 협의회의 사이버 신고센터에는 ‘월 판매대수가 30∼35대에 불과한데 목표를 지난달 45대, 3월 56대를 주면 죽으라는 것이냐’,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채 쌓여만 가는 차를 하늘에 보관해야 할 처지’ 등의 불만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현대차측은 “목표를 달성하면 받는 포상금 때문에 대리점에서 무리하는 것일 뿐 압력은 없다”고 반박했다.

▽왜, 무엇이 문제인가=밀어내기는 영업사원과 소비자의 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다.

영업사원의 경우 보관에 따른 주차료 등은 물론 출고일로부터 30일이 지나도 취득세를 내지 않을 경우 취득세의 10∼20%의 가산세를 내야 한다.

대우자동차판매의 한 관계자는 “선 출고된 차는 아무렇게나 보관되기 쉬워 품질 이상이 생길 수 있다”며 “보증기간도 출고한 날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고객만 손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생산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없는 국내의 현실을 감안할 경우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있다.

산업연구원 이항구 자동차·조선팀장은 “노조 때문에 고용을 줄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생산시간만 단축하면 회사의 부담이 크다”며 “여기다 일본 등 선진국과 달리 국내 업체들은 하나의 생산라인에서 다양한 차종을 생산하지 못해 유연성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현대차는 이달 초부터 울산 및 아산공장의 일부 라인에서 휴일근무와 연장근무를 없애는 방법으로 준중형차와 소형 포터 등의 생산을 줄이고 있다.


고양=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김현진기자 brigh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