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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보니]윤여봉/中東에 가면 여유를 배우세요

입력 | 2004-03-19 18:21:00


중동에서 6년 넘게 근무하면서 만나게 되는 현지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한국말 몇 마디를 들려준다.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역시 ‘빨리 빨리’. 낮 기온이 50도를 넘나드는 열사의 공사현장에서 기일 내에 공사를 마쳐야 했을 한국인들은 ‘빨리 빨리’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을 것이다.

서두르는 것이 일상화된 한국인에게 중동 사람들의 생활태도는 답답하기까지 하다. 중동에서 근무해 봤거나 중동 영업을 해 본 한국인들은 중동 문화를 흔히 ‘IBM 문화’라고 한다. I는 Insha Allah(인샬라·알라의 뜻에 따라), B는 Bukra(부크라·내일), M은 Malish(말리시·미안하다)를 뜻한다. 외국인이 IBM의 의미를 정확히 알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IBM의 의미를 알아 나가는 과정은 중동인의 의식구조를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중동인은 상대방과 약속하거나 미래형 얘기를 할 때면 항상 말끝에 ‘인샬라’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처음 이 말을 듣게 되면 “혹시 알라의 뜻을 핑계로 약속을 못 지킬 수도 있다는 건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중동에서 한동안 살다 보니 ‘인샬라’는 “반드시 지키겠다”는 후렴구이며 강조어인 것을 알게 됐다. 항상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중동 사람들에게 ‘인샬라’는 어쩌면 ‘알라의 도움으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겸양 섞인 표현이다.

중동 국가의 관공서나 상점에 가면 ‘부크라’라는 단어를 자주 듣게 된다. “내일 오라”는 의미로 알고 다음 날 가면 허탕을 치기 일쑤다. 한번은 사우디아라비아 친구에게 이에 대해 불평하자 그는 “너는 아직도 아랍을 모른다. ‘부크라’는 ‘내일’이 아니고 ‘나중’이라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세상사가 인간이 아닌 신의 의지에 달린 것이니 내일이라고 정확하게 규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수년 전 이곳에서 앞차를 가볍게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 나는 엉겁결에 ‘말리시’를 연발했는데 앞차 운전자 역시 ‘말리시’라고 하는 것 아닌가. ‘말리시’는 ‘미안하다’와 함께 ‘괜찮다’는 의미도 함께 담고 있었다. 중동 문화를 잘 모르는 한국인들은 이 지역 사람들이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말리시’를 남발한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실상 ‘말리시’는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서로 이해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는 ‘중동을 바로 알자’는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미국 일변도의 사고에서 벗어나 중동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아직 한국에서 중동 지역과 문화에 대한 인식은 우호적이지 못한 편이다.

우리에게 낯선 종교와 가치관을 가진 중동 사람들은 가난하고 시간 개념도 없으며 성실하지 못한 사람들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라가 준 선물(석유)에 감사하며 이슬람 계율을 지키며 살아가는 중동 사람들에게서 한국인들은 여유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인들이 ‘빨리 빨리’ 문화를 장점으로 승화했듯이, 중동의 ‘IBM’ 문화를 종교적 신념 속에 삶의 여유를 찾으려는 노력으로 이해하는 넉넉함이 필요한 듯하다.

윤여봉 삼성물산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지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