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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戰 1년]또다른 명분 ‘민주주의’

입력 | 2004-03-19 19:09:00


《“미국은 (타국을)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제국이 되려는 욕심도 없다. 우리의 목표는 민주적인 평화 실현이다. 이 점에서 이라크의 민주화는 (전쟁의) 현실적인 목표다.”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올해 1월 연두교서를 통해 전후 대이라크 전략목표를 수정했다. 대량살상무기(WMD) 제거와 테러 퇴치라는 초기 전쟁 명분이 ‘민주화’로 바뀐 것이다. 사담 후세인 정권이 축출된 상황에서 목표 수정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민주화’의 개념과 실체를 둘러싼 미국과 이라크, 나아가 아랍권의 시각차는 크다. 그러나 ‘미국이 의도하는 민주화’는 이슬람권에 뿌리내리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민주화’를 놓고 또다시 힘겨운 싸움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다.》

미국의 구상대로 이라크에는 적어도 형식과 제도적인 면에서 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졌다. 이달 초 서명된 임시헌법에 따라 이라크는 6월 말 주권을 건네받아 내년에 스스로 헌법을 제정한다. 국회의원과 대통령도 뽑는다.

▽민주화에 대한 이견=미국은 이라크를 지렛대 삼아 중동 전체를 민주화한다는 대중동 구상(the Greater Middle East Initiative)을 세웠다. 이는 중동의 권위주의가 테러의 근원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왕정(王政)과 독재 종식→민주화를 통한 우호세력 집권→테러 소멸이라는 ‘로드맵’이다. 이라크는 그 첫 번째 실험장인 셈이다.

▼관련기사▼

- 미국의 대차대조표
- 세계로 퍼지는 테러

폴 울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은 “이라크에 민주주의가 도입되면 시리아 이란 레바논 등 반미 성향의 아랍국들도 연이어 민주국가가 될 것”이라는 민주주의 도미노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아랍권의 뿌리 깊은 반미감정은 미국의 구상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달 초 방한한 이라크 기업인 11명에게 본보가 설문조사한 결과 ‘미국은 적국’ 혹은 ‘두고 봐야 안다’며 반미감정을 표출한 응답자가 10명, ‘우방’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1명뿐이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 리서치센터가 이달 초 중동 주요국 80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미국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응답이 요르단 93%, 모로코 68%, 터키 63%, 파키스탄 61% 등으로 나타났다.

▽흔들리는 아랍=이라크발 민주화 실험은 아랍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랍권의 맹주이며 왕정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벌써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다.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1981년부터 통치하고 있는 이집트, 무아마르 카다피 최고지도자가 35년간 독재체제를 굳힌 리비아, 87년부터 벤 알리 대통령이 통치하는 튀니지 등도 영향권이다.

이를 의식해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지난달 사우디아라비아를 전격 방문, 파드 국왕과 ‘중동의 독자적 개혁 구상’을 발표했다. 이달에는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과 만나 대응책을 논의했다. 미국의 구상대로 따라가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중동국가들의 움직임에 유럽은 적극지지 의사를 나타냈다. 그러나 미국이 대중동 구상을 폐기하거나 절충안을 만들지는 미지수다.

▽민주화의 과제=인도의 영자지 힌두스탄 타임스의 비르 상흐비 편집국장은 18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라크는 종족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있어 미국식 민주주의는 성공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민주화 ‘이식수술’을 하기에는 이라크의 역사와 문화가 너무 이질적이라는 것이다. 이달 2일 시아파 최대 행사인 ‘아슈라(애도의 날)’ 행사장에 수니파의 소행으로 보이는 동시다발 폭탄테러가 발생, 270여명이 사망한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라고 그는 지적했다.

종족 종파 갈등뿐 아니라 십자군전쟁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내재된 뿌리 깊은 외세에 대한 반감도 관건이다.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김경민 교수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보편적 선으로 볼 수 없다”면서 “주입식 민주화보다는 다양한 종족, 복잡하게 얽힌 역사를 고려한 ‘이라크 방식의 민주주의’가 도입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