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정국을 계기로 한국사회에는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면서 홍수처럼 밀어닥치고 있다. 광기라고 할 정도로 거세다. 더욱이 이 포퓰리즘을 이용하려는 특정 정치세력의 선동정치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국회에서 다수를 차지한 정당이 나라를 바로 세울 대안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포퓰리스트들의 득세에 일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포퓰리즘의 망령과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면 의회민주주의로 제도화되어야 할 자유민주주의의 설 땅은 없어진다.
▼탄핵정국 포퓰리즘 경계해야 ▼
칼 포퍼는 1945년에 초판이 나온 그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열린사회(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나 전투적 종교 등과 같은 근본주의 이데올로기와 파시즘 등을 꼽았다. 현재 한국사회에는 이 현상들이 서로 혼합(hybrid)되어 포퓰리즘으로 표출되면서 파괴적인 폭민 현상으로 나타나는 듯한 조짐이 보이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블랙홀과 같아서 무한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중심을 바로잡지 않으면 빨려 들어가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이런 현상은 카를 야스퍼스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사회가 ‘최종적인 포괄자(새로운 통합)’를 기다리는 ‘한계상황’에 봉착해 있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포퓰리즘의 해악과 폐단은 역사적으로 숱한 갈등과 고통을 안겨 주었다. 로마시대에 정상적인 입법기관인 원로원을 장악하지 못한 독재자 줄리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을 피해 직접 대중에게 호소하여 정치를 독재화시킨 ‘시저리즘(Caesarism)’을 시작으로,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와 당통 등이 주도한 ‘과격민주주의’의 피의 정치도 포퓰리즘을 악용한 것이었다. 레닌이나 스탈린에 의한 ‘무산자 독재의 전위대’도,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무솔리니의 파시즘도 포퓰리즘을 악용한 정치였다. 최근 아르헨티나를 경제적 도탄 속으로 몰아넣은 페로니즘도 전형적인 포퓰리즘 현상이었다. 직접 민주정치 또는 대중(민중) 민주정치를 표방하는 포퓰리즘 정치는 결국 소수의 광기어린 전위대에 의한 자의적 전횡과 횡포로 귀결되기 십상이라는 것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포퓰리즘의 일차적 진원지가 시민단체로 위장하고 허구적인 자주와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친북 반미 좌파들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북한의 반인륜적 반인권적 공산 독재정권을 포용하며 ‘민족공조’를 외쳐 대는 이들은 건전하고 건실하며 국가이익에 보탬이 되는 우방과의 동맹을 포용하지 못하고, 국내에서는 정치적 동반자인 야당도 포용하지 않고 있다. 이들은 이 나라의 모든 가치와 법제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갈등과 해체를 충동하며 ‘내 편과 네 편’으로 편을 가르는 분열과 대립의 사회를 만들어 놓고 말았다. 때로는 특정 정치세력의 ‘홍위병’을 자처하며 독선적 아집으로 배제의 정치를 부르짖고 있다.
대통령 탄핵의 절차는 헌법과 법률이 정한 민주주의의 제도대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탄핵제도를 거부하는 것은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말살행위다. 증오와 분노에 싸여 집단적 히스테리를 발산해서는 안 된다. 국민이 두 패로 갈라서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울 이유는 없다. 국정은 법과 제도에 의한 국가시스템에 따라 운영되게 되어 있다. 그러니 국민이 불안해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국민 에너지 통합 방안 찾도록 ▼
파괴적이고 시대 역행적인 광기로 가득 찬 포퓰리즘이 이 나라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이 나라의 운명은 그런 포퓰리즘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어떻게 지킨 나라인데, 어떻게 발전시킨 나라인데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는 우리 국민이 악성 종양 같은 포퓰리즘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느냐는 문제의 척도가 될 것이다. 이제 국가 리더십은 급진주의의 전위대격인 포퓰리즘을 순화시켜 국민의 에너지를 통합의 방향으로 모아 낼 정책적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류재갑 경기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