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투 가이즈’ 촬영장에서였습니다.
7층 옥상 난간에 몸이 반쯤 걸린 채 액션을 벌이는 장면인데, 그냥 밑에서 두 다리만 꽉 잡아주면 된다고 하자 스턴트 팀은 계속 집요하게 안전이 중요하다며 와이어가 연결된 안전조끼도 입으라고 했습니다. 몸에 딱 맞고 생각처럼 불편하지도 않은 장비를 몸에 걸치면서 저는 다시 한번 격세지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로보트 태권 V’를 만든 김청기 감독님의 '바이오 맨'을 찍었던 게 1988년입니다. 순직한 국가특수요원이 인조인간 ‘바이오 맨’으로 다시 태어나 범죄조직을 소탕한다는 내용이었지요. 태국 홍콩 등지에서 로케를 한 영화였는데, 스턴트 없이 악어와 싸우다 악어 꼬리에 복부를 맞아 기절하는 등 어려운 장면이 많았습니다. 번들거리는 구릿빛 피부에 군복바지, 검정 런닝 셔츠를 입은 저는 악의 무리들을 M60 총으로 쓰러뜨렸고, 그들이 아무리 총을 쏴대도 인조인간이므로 끄덕 없는 바이오 맨을 연기했습니다. 전 총알을 수십 발 맞으면서도 씨익 웃는 장면을 무수히 찍어야만 했습니다.
지금이야 촬영전문용 피 주머니를 옷에 장착하고 리모콘을 작동해 안전하고 간단하게 촬영을 끝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사제 폭약을 고무로 싸서 몸에 붙이고 유선으로 터뜨리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전 한국영화를 보면 총 맞은 사람 몸에서 피 대신 연기가 나오곤 했지요.
열대여섯 발이 몸에서 터지는 촬영을 하던 도중 말도 못하게 뜨거웠지만 ‘컷’ 소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참으며 계속 씨익 웃었습니다. 이 때 입은 화상으로 가슴과 허벅지에 흉터가 몇 년 동안 남아 있기도 했지요.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공중을 나는 와이어액션을 끝내고나면 쓱쓱 묶어 맨 와이어 때문에 사타구니에 피멍이 드는 일은 예사였습니다. 그러니 이전에 열정과 애정 하나로 고군분투하며 영화를 찍으셨던 선배님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요즘 충무로 촬영장의 분위기는 전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좋습니다. 풍부한 제작비는 각종 첨단장비들의 사용을 가능케 해 촬영을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만들며 영화의 질을 크게 향상시켜줍니다. 그러나 기술의 향상을 넘어서서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등 1000만 관객의 대기록을 이룩한 오늘날 우리 영화계의 발전에는 무엇보다도 인적 자원의 질적 향상이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확신합니다.
머리를 갖가지 색으로 염색하고 밤에도 제멋에 까만 선글라스를 끼며 귀를 뚫어 귀고리를 몇 개씩이나 한, 겉모습만 봐서는 영화를 오히려 망쳐놓을 것 같은 젊은 스태프들이 현장엔 참 많습니다. 제가 봐도 불안할 정도니 저보다 나이든 선배님들은 더 걱정스러우시겠지요.
그런데요. 이 스태프들이 아무리 춥고 힘들어도 꾀 한번 부리지 않고, 맡은 바 자기 일을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갖고 감독의 지휘 하에 일사분란하게 해내고 있어요. 지휘라고 해도 옛날처럼 고함을 지르거나 큰소리가 오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옛날 생각만 한다면 감독의 권위가 없어졌다고 근심할 만한 광경도 자주 보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요즈음 훨씬 더 잘 만듭니다.
비단 영화계뿐만 아니라 요즘 젊은이들이 지닌 내면의 프로다운 자세는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우리의 에너지이며, 앞으로 더 좋은 나라를 만들어갈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수십만 명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운집한 촛불집회에서, 끓는 피를 자제하며 자신들의 의사를 평화적으로 쏟을 줄 아는 젊은이들이 있는 한 우리의 미래는 희망적이리라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moviejh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