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드런의 한 동호인이 ‘80세에 42.195km’문구가 세겨진 깃발을 들고 뛰고 있다. 사진제공=위드런
‘지구 한바퀴 그 날까지’, ‘80세에 42.195km’.
마라톤대회 때마다 이런 문구가 쓰인 커다란 깃발을 들고 뛰는 마라토너들이 있다. 위드런(www.withrun.com) 클럽. 달리는 것이 좋아서 모인 동호인 단체지만 다소 황당해 보이는 문구처럼 일반 동호회와는 다른 구석이 있다.
이들의 목표는 ‘기록을 얼마나 줄였느냐’가 아니라 ‘얼마를 달리느냐’이다. 마스터스에게 꿈의 기록인 서브3(3시간 이내 풀코스 완주)을 따지지 않는다. 빠르게 달린다고 꼭 건강에 좋은 게 아니라는 믿음에서다.
‘위드런’은 지난해 4월23일 대구에서 자동차회사 지점장으로 있는 오장길씨(40)가 ‘건강하게 꾸준히 달리고 마라톤 일지를 써보자’는 취지로 인터넷사이트를 개설해 탄생했다. 첫 회원은 오씨와 프로그래머 서현대씨(43) 단 두 명. 하지만 사이트가 개설된 지 1년이 채 안돼 회원수가 1400명을 넘을 만큼 급성장했다.
오씨는 “지구 한바퀴라는 목표가 있는데다가 인터넷상으로 서로의 경험을 주고받으며 격려할 수 있어 입소문으로 회원수가 많이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마라톤대회가 열릴 때마다 ‘깃발’을 통해 서로 만나고 있는 위드런 회원들. 사진제공=위드런
위드런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자신은 물론 다른 회원들이 지금쯤 어디를 뛰고 있는 지 볼 수 있다. 달린 거리가 5247.1km인 오씨는 필리핀 마닐라를 지나 싱가포르로 향하고 있고 22일 아시아구간을 마친 이동준씨(48)는 유럽구간 출발점인 핀란드 헬싱키를 출발했다.
그렇다고 실제 해외 원정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매일매일 뛴 거리를 일지에 올려놓으면 전 세계를 대륙별로 6개 구간으로 나뉘어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 그래픽으로 볼 수 있다.
인터넷에서 시작된 만큼 전국적인 조직이지만 각자 마라톤클럽에서 활동하면서 대회 때마다 만난다.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등에 붙인 스티커와 깃발.
회원수만큼이나 특이하거나 가슴 찡한 사연을 가진 회원들도 많다. ‘통하지짱’으로 불리는 장현석씨(35)는 경련이 생긴 다리를 옷핀으로 찌르면서 뛴 지난 14일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경험을 위드런 홈페이지에 올려 수십개의 격려 댓글을 받았다. 대전에 사는 ‘검은마녀’는 교통사고로 다리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받았지만 최근 배낭을 메고 10km를 뛰었다.
닉네임이 ‘마라톤’인 정근호씨(38)은 94년 동아마라톤 마스터스부문 우승자. 이후 부상으로 달리기를 접었다가 자신의 아픈 경험을 남들이 되풀이하지 않도록 매일 부상 방지 및 운동법에 대한 글을 찾아 사이트에 올린다. 정작 위드런을 만든 오씨는 동호회를 운영하느라 좀처럼 뛸 기회가 없다. 대신 그는 마라톤대회 마다 사이클에 녹음기를 매달고 신나는 음악을 틀어주며 달리는 회원들을 응원한다.
전 창기자 j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