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이볜(陳水扁) 대만 총통이 23일 야당의 재검표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대만 정국은 일단 파국은 피하게 됐다. 그러나 재검표 시기 등을 둘러싸고 여야간에 첨예한 대립을 빚어 정국 혼란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재검표 발표=천 총통은 오전 행정원 입법원 사법원 감찰원 고시원 등 5부 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야당이 요구하는 ‘즉각적인 전면 재검표’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표를 조작했다는 비난은 나의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며 서운해 하기도 했다. 천 총통은 또 5부 원장들에게 상의를 벗고 총상 자국을 보여주며 “국내외의 의혹이 많아 이렇게까지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감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특히 그는 오후 TV를 통해 재검표 수용 성명을 발표하면서 총격 사건이 조작이 아니라고 거듭 밝혔다. 그는 총상을 입고도 걸어서 병원에 들어간 데 대해 “국가지도자로서 쓰러진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천 총통은 사건 직후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데 대해 “아내가 19년 전 정치테러를 당한 뒤 입원 치료를 받았던 곳”이라면서 목소리를 가늘게 떨며 울먹이기도 했다.
▽여야 충돌=천 총통의 재검표 수용 방침에 따라 이날 낮 12시쯤 입법원 운영위원회가 개최됐으나 ‘행정검표 제도’ 도입을 위한 ‘총통 부총통 파면법’ 수정안의 의사 일정을 둘러싸고 여야가 격렬히 충돌했다.
민진당은 ‘득표율 차이가 1% 미만일 경우 투표일로부터 7일 안에 행정부에 부분 또는 전면 재검표를 요구할 수 있다’는 수정법안을 내놓았으나 “이번 선거에 이 조항을 적용할 것인지는 앞으로 세 차례의 법안 심의를 거쳐 결정하자”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대해 국민-친민 야당연합은 “세 차례 법안 심의를 거치겠다는 것은 법안 수정을 무기한 늦추겠다는 술책”이라면서 “오늘 두 차례의 심의로 법안을 통과시킨 뒤 이르면 25일 재검표를 실시하자”고 맞섰다.
결국 국민당의 랴오펑더(寥風德) 운영위원장이 “더 이상 논의가 불가능하다”며 산회를 선포하자 민진당 입법위원들이 “왜 산회하느냐”며 랴오 위원장의 멱살을 잡고 야당 위원들에게 서류와 집기를 집어던져 여야간에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향후 ‘재검표 정국’ 전망=천 총통이 재검표를 통한 ‘정면 돌파’ 전략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은 총격 사건 및 선거 조작 의혹에 대한 야당측의 항의시위와 국내외의 따가운 시선을 더 이상 묵살하기 어려운 상황에 몰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천 총통이 재검표 요구를 수용한 것은 미국의 압력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는 게 현지 정치 분석가들의 전언이다. 미 국무부는 선거 다음날인 21일 “대만 국민이 민주적으로 선거를 치른 것을 축하한다”는 성명을 내놓았지만 천 총통의 당선 축하 메시지는 발표하지 않았다.
특히 대만주재 미국대표부 대표가 낙선자인 롄잔(連戰) 후보를 먼저 만나 1시간여 밀담을 나눈 뒤 천 총통을 면담해 ‘야당 요구 수용’과 ‘평화적인 사태 해결’을 종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평론가인 후중신(胡忠信)은 “천 총통이 겁내는 것은 미국이지, 롄 후보나 야당 지지자들의 항의시위가 아니다”면서 “롄 후보가 선거 결과 발표 후 강경 투쟁에 나선 것도 미국의 배후 지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검표 실시라는 큰 방향은 잡혔지만 법안 수정을 둘러싼 여야간 이견이 해소되지 않는 한 앞으로 상당기간 정국 불안이 계속될 전망이다. 야당은 27일 전국적으로 100만명을 동원하는 대규모 선거부정 규탄시위를 벌여 천 총통을 더욱 압박할 계획이다.
타이베이=황유성특파원 ys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