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남자충동’(조광화 작·연출)을 보고 후련했다. 실컷 욕을 퍼붓고 싶은 대상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대신 해준 느낌이랄까.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얼굴이 좀 화끈거렸다. 무대 위에 오가는 남자군상 가운데 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1997년 초연에 이어 주인공 ‘장정’ 역을 맡은 안석환은 여전히 무대 위에서 수컷의 냄새를 진하게 풍겼다. 그는 영화 ‘대부’에 나오는 알 파치노처럼 ‘패밀리(가족과 조직)’를 잘 건사하는 것이 사내의 임무라고 믿는 남자다. 그는 자신이 약해보일 것 같다는 두려움에 휩싸일수록 ‘강해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더욱더 잔인한 짐승처럼 변해간다.
‘장정’ 같은 남자들은 우리 현실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자기 패거리의 이익을 지킨다며 걸핏하면 힘자랑에 나서는 남자들은 밤거리 조직폭력배뿐만 아니라 정치권 등 다른 분야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다. 가부장적인 형을 증오하면서도 그 힘을 동경하는 ‘장정’의 동생 ‘유정’(이남희), 주먹 앞에 비굴하게 무릎을 꿇으면서 안락함을 얻는 ‘달수’(오달수)같은 남자들도 주변에서 쉽게 발견된다.
극중 ‘장정’에 당당하게 맞서는 유일한 남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장남자인 ‘단단’(김재만)이다. 연출가 조광화는 초연 때보다 유정의 애인인 ‘단단’의 비중을 늘려 남성들의 허위의식에 대해 뚜렷한 메시지를 보내고자 한다. 극중 가장 감정이 고조되는 때는 ‘단단’이 ‘장정’에게 겁탈당하는 순간. ‘단단’은 자신이 게이임이 드러나는 비참한 순간에도 ‘장정’을 향해 통렬한 조소를 보낸다. “지겨운 남자들! 터무니없이 힘만 쓰려드는 남자들! 천년만년 세월이 지나도 짐승이야. 나 남자 되기 싫다. 너 같은 남자꼴 될까봐 여자가 되고 싶어!”
‘장정’ 역에 안석환과 더블캐스팅된 최광일(영화배우 최민식의 동생)의 연기에서도 신선한 열정이 느껴진다. 특히 마지막 죽는 장면에서 그의 영화적인 리얼한 연기는 매우 돋보였다. ‘단단’ 역을 맡은 뮤지컬 배우 출신 김재만의 여장남자 연기도 소름끼칠 정도로 도발적이어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4월 18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화∼목 오후 7시반, 금토 오후 4시반 8시, 일 오후 4시반. 2만∼4만원. 02-764-8760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