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이 아닌 요즘 이야기입니다. 한 왕국에 공주님들이 많이 살고 있어요.
상큼 장미, 앤틱 로즈, 보라 딸기, 오드리 헵번, 바이올렛…. 공주님들은 이곳에서 실명 대신 달콤하고 어여쁜 대화명을 씁니다.
그 은밀한 장소는 ‘레니본 카페(http://cafe.daum.net/reneevon)’라는 인터넷 나라입니다. 레니본이라는 국내 여성 기성복 마니아 공주님들이 2001년에 만들어 알음알음 1만5000여명이나 모였습니다.
공주님들은 공주 옷을 첫눈에 알아 봤습니다. 중세 고성에 살았음직한 공주 얼굴이 박힌 브로치, 목에 두르는 꽃무늬 프티 사이즈 스카프, 짧은 볼레로 스타일 재킷….
딱 공주 스타일인 이 옷에 대해 공주님들은 신중하게 품평하고 정보도 나눕니다. 입던 옷을 다른 공주님에게 ‘입양’(남에게 되파는 것)도 시킵니다. 인터넷 왕국에서 살짝 외출을 감행해 오프라인 티 타임 만남도 종종 가집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공주님들 대부분이 10대 소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20대 후반∼30대 중반이 압도적으로 많지요. 과거 남몰래 “거울아, 거울아. 나 예쁘니” 했던 공주님들은 더 이상 공주라는 신분을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공주님들의 왕국은 레니본 카페뿐이 아니었어요. 무려 65만여명의 공주님 회원을 가진 ‘예뻐지는 카페(http://cafe.daum.net/makeupsarang)’, 13만여명이 활동하는 ‘마술처럼 예뻐지기(http://cafe.daum.net/sweetbetty)’ 등 메이크업 노하우를 공유하는 그들의 왕국이 인터넷에는 아주 많답니다.
‘공주병’이란 말은 흔히 부정적으로 쓰이지만, 발상을 전환하면 좋은 점도 있습니다. 난 그럴 만하니까 라고 자신을 고귀하게 여기며 행동하니까요. 왕자님을 기다리기 위해 공주님 치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찾아내 스스로를 업그레이드시키니까요.
소설 ‘프린세스 다이어리’는 미국 뉴욕 맨해튼의 평범한 여고생이 알고 보니 유럽 작은 왕국의 공주였다는 내용입니다. 여주인공 아멜리아 공주의 다짐은 우리 시대 공주님들의 신조를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든 아니든 모두에게 친절할 것, 늘 내 감정을 속이는 일은 그만둘 것, 아무리 약이 올라도 품위를 지키도록 노력할 것, 너무 드라마틱하게 생각하지는 말 것.’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