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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91년 ‘개구리 소년’ 실종

입력 | 2004-03-25 18:43:00


‘개구리 소년’들의 해맑은 얼굴엔 늘 장난기가 그득했다. 아무 일에나 마냥 깔깔댔고 재잘거리며 동네를 헤집었다.

1991년 3월 26일. 이날은 30년 만에 부활한 지방의회 선거로 마침 공휴일이었다.

“오늘은 뭘 하지?” 집을 나선 아이들의 발걸음은 쟀다. 인근에 있는 군(軍) 사격장에도 기웃거렸을 테고, 냇가에서 물수제비라도 뜨며 소일했을 터이다.

못내 싱거웠을까. 아이들은 용이 승천하다 떨어졌다는 와룡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상엿길’을 따라 올라간 그 길을 아이들은 끝내 다시 밟지 못했다. 2002년 9월. 11년도 훨씬 지나 산기슭에서 아이들의 유해가 발견된다.

세월은 또 얼마나 무심한지, 유골 발굴현장에서 수색작업에 나선 경찰 중에는 ‘개구리 소년’ 김영규군(당시 11세)의 초등학교 한 반 친구도 있었다.

‘개구리 소년’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던 김종식군(당시 9세)의 아버지는 그 사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떴다. 간암이었다. “혹시 길거리에서 아들을 만날지 모른다”며 1.4t 화물트럭을 끌고 전국을 돌아다녔던 그였다.

‘개구리 소년’ 사건은 이제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다. 아직까지 범행에 쓰인 ‘도구’가 무엇인지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경찰은 시종 ‘허둥댔다’.

실종신고를 받고 처음부터 ‘단순한 모험성 가출’로 단정하는 우(愚)를 범했고, 와룡산을 ‘이 잡듯이’ 뒤지고도 시체를 찾아내지 못했다. ‘명함 크기’의 물체까지 확인했다는 데도.

정작 유골이 나왔을 때는 발굴현장을 심하게 훼손해 결정적으로 수사를 그르쳤다. 그리고는 서둘러 “아이들이 길을 잃고 헤매다 밤새 ‘저체온’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유해가 발견된 곳은 민가에서 불과 250m 떨어져 있었는데도.

경찰 집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4000여명의 어린이가 실종돼 이 가운데 300∼500명이 영영 부모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 많은 ‘개구리 소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