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광고회사가 얼마 전 전국의 45∼64세 남녀 1200명을 표본 조사해 그들을 와인세대(WINE·Well Integrated New Elder)로 명명했다. 시간을 두고 숙성하는 포도주처럼 인고의 시기를 거쳐 새롭게 태어난 세대라는 의미다. 이 세대의 특징은 가정 내 권력이 가부장에서 가모장으로 급격히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 실제 의사 결정과 소비의 주도권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고 있다. 바야흐로 한국 총선 정치판의 주도권도 큰 물결처럼 여성에게로 이동하고 있다.
▷민주당 조순형 대표와 추미애 의원의 갈등은 한국 정치에서 가부장과 가모장의 대결을 시사한다. 조 대표는 지난달 추 의원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의 거듭된 당 쇄신 요구에 대해 “내 나이 내년이면 일흔이다. 가세가 기울어 나이든 아버지가 돈 벌러 나가려는데 장성한 자식들이 돈벌이가 안 된다고 투정하는 격”이라고 토로했다. 이때 추 의원은 “대표가 어느 일방에 대해서는 온정주의를 보여주면서 개혁을 요구하는 다른 일방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가부장적 자세로 묵살한다”고 맞섰다.
▷탄핵 역풍으로 난파선의 선장이나 다름없게 된 조 대표의 모습은 가세가 기운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발언권이 크게 약해진 한국의 가부장을 연상시킨다. 반면 똑 부러지게 할 소리 다하며 자기주장을 되풀이하는 추 의원의 모습은 한국 가정의 새로운 실세(實勢)로 등장한 가모장을 떠올리게 한다. 민주당 손봉숙 상임중앙위원은 추 의원에게 선대위원장직 수락을 요청하면서 “민주당의 어머니가 돼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추 의원은 아예 딴 집 살림을 작정한 사람처럼 비친다.
▷부모가 주도권을 다투는 사이 골병드는 것은 자식뿐이다. 조 대표가 지역감정의 벽을 넘기 위해 대구로 옮겨 출마한다고 했을 때 “이 시점에 대표를 대구에까지 내려보내야 하느냐”며 울음을 터뜨렸던 추 의원이 아니던가. 조 대표는 사실 ‘가부장적’이라기보다는 ‘가정적’인 사람이다. 두 사람이 잘 익은 포도와 오크통 같은 조화로 명품 와인을 숙성시킬 수는 없을까. 가부장이건 가모장이건 “가장(家長)이라면 가족을 위해 벽에 기대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던 옛 어른들의 말씀은 너무나 지당하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