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여고생들을 찍은 ‘소녀연기’ 연작 앞에 서 있는 사진작가 오형근씨. 그는 ‘교복’을 입고 있는 다양한 여고생들의 표정과 포즈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허문명기자
사진작가 오형근씨(41)가 이번에는 여고생을 찍었다. ‘초상사진’이란 독특한 장르를 개척해 온 그는 5년 전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가진 개인전 ‘아줌마’를 통해 욕망과 일탈, 모성과 권태에 젖은 다양한 아줌마들을 솔직하게 화면에 담아 ‘진짜 아줌마들의 모습이다’ ‘또 다른 왜곡이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번 작업도 자칫 논란의 도마에 오를 확률이 높다. 그의 앵글에 잡힌 여고생들은 평범한 10대가 아니라 ‘배우가 되고 싶다’는 구체적 욕망을 가진 소녀들이기 때문이다. 미성년자 초상권 문제 때문에 ‘평범한’ 여고생을 찍지 못한 작가는 궁리 끝에 연기학원 수강 여고생들을 대상으로 촬영했다. 5월 2일까지 서울 세종로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소녀연기(Girl's Act)’전에는 작가가 3년 동안 여고생 70여명을 찍은 대형 흑백사진 60여점이 나온다.
‘소녀’와 ‘여성’의 경계에 선 여름철 교복 차림의 소녀들은 몸에 꼭 끼게 교복을 고쳐 입었다든지, 팔짱을 끼고 도발적 눈길로 정면을 바라본다든지, 앞섶 아래가 열려 속옷이 얼핏 보인다든지 해서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작품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섣부른 오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실물크기 사진에 보송보송한 솜털까지 모두 보이는 소녀들의 얼굴과 포즈는 어딘지 익숙하다. 다름 아닌 영화 포스터, 광고 스틸사진, 패션 잡지나 TV 화면에서 익히 보아왔던 모습들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눈에는 외로움과 피로, 희망과 두려움, 호기심과 무관심이 경계 없이 뒤섞여 있다. 전시 제목 그대로 소녀들은 ‘교복’이 상징하는 ‘제도’ 속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나아가 ‘제도’라는 틀 안에 안착하고 싶지만, 그와 동시에 안착의 대가로 지불하기 위해 ‘연기’해야 할 것들을 계산하는 바로 우리 자신의 얼굴이기도 하다.
“도대체 우리들 머릿속에 각인된 ‘소녀성(少女性)’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 문제를 근본적으로 탐구하고 싶었다”는 작가는 “여고생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찍은 것”이라고 말했다. 아줌마를 찍은 게 아니라 우리 사회를 찍었다는 5년 전의 시도와 같은 맥락이다.
작가에게 ‘아줌마, 여고생 말고 남자 사진을 통해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는 없었는가’라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한국 남자들에겐 아우라(Aura), 이른바 분위기가 없다. 찍어 놓으면 뭔가 읽혀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4월 17일 오후 3시에는 사진작가 박영숙씨, 이영준 계원조형예술대 교수(이미지비평가), 정주하 백제예술대 교수 등이 참여해 ‘소녀연기’ 토론회를 갖는다. 02-2020-2062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