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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준칼럼]‘무너지는 법’ 피해자는 약자

입력 | 2004-03-29 22:25:00


그로기(groggy). 마구 얻어맞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비틀함.

오늘 대한민국의 법이 이런 상태로 보인다. 차라리 법이 권력과 여론과 집단시위 앞에 흰 수건을 던져버리면 어떻게 될까, 이 나라는.

노무현 대통령이 법과 대결한 몇 장면이 떠오른다. 침묵의 고통에 빠진 대통령은 왜 또 끌어내는가. 복권되건 파면되건 지금의 시계(視界)에선 법치의 사활을 가를 존재이기 때문이다.

16년 전 노무현 의원은 현대중공업 파업현장에서 연설했다.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는 지키지 않아야 합니다.”

지난해 대통령을 만난 기업인들은 노사현장에서 법이 지켜지도록 해달라고 주문했다. “나한테 법, 법 하지 말라. 당신들은 법 다 지키느냐”가 답이었다.

▼법의 위기 중심에 선 대통령 ▼

석 달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공명선거에 협조해 달라고 하자 대통령은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묻고 싶다”고 했다. 이달 초 선관위는 대통령이 선거법을 어겼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내가 받은 공문에는 위반했다는 말이 없다”며 사과를 거부했다.

이는 대통령이라는 헌법기관과 선관위라는 헌법기관의 충돌이기 전에 대통령 자신의 법의식(法意識)과 실정법의 싸움이다. 그는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팔을 들었다. 인정하기 싫은 법에 대한 불복선언이다.

대통령 당선자 시절엔 “헌법해석을 바꿔서라도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를 반드시 도입하겠다”고 했다. 대통령이 헌법해석을 바꾸겠다는 것은 헌법재판소에 부여된 고유권능을 부정하는 월권으로 헌법파괴적 발상이다. 그 헌재(憲裁)가 목하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절차를 밟고 있다.

국회의원 71%가 찬성한 대통령 탄핵소추에 대해 비슷한 비율의 국민이 반기(反旗)를 들었다. 그 이유의 하나는 당신들이 그럴 자격 있느냐다. 차떼기가 웅변하는 불법 탈법 부패의 장본인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느냐다.

그렇다고 대통령 탄핵소추가 헌정중단은 아니다. 헌법에 따라 총리가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처럼 그 후에도 경제 사회는 안정돼 있다. 하지만 법의 위기에 브레이크가 풀렸다.

합법적 탄핵 반대가 방해받은 적은 없다. 그런데도 법 테두리를 벗어난 집단행동이 잇달았고 법집행은 무력했다. 집시법 선거법상 불법 야간 정치집회가 실정법을 정면부정하면서 2주간 계속됐다. 자발적 참가자가 많았더라도 주도그룹의 불법은 불법이다. 일부 공무원과 교직자는 공무원법 교원노조법상 불법인 집단적 정치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그 동심원(同心圓)의 중앙에 ‘시민혁명’을 북돋우고 선관위 결정을 일축한 대통령이 있지 않은가.

탄핵에 반대하는 여론은 별개다. 야당들은 지지율 추락으로 이미 치명적 대가를 치르고 있다. 유권자는 총선에서 말하면 된다.

법을 무력화하는 행동은 민주의 길이 아니다. 법이 죽고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살기를 바랄 수는 없다. 법치가 무너지고는 어떤 정치개혁과 정치발전도 이루어질 수 없다.

대통령부터 지키고 싶은 법만 지키고, 권력 강화를 위해 지지자들의 불법을 묵인한다면 공권력 붕괴와 무정부상태를 부채질한 죄를 면하기 어렵다. 나라와 역사를 생각하는 대통령이기를 포기할 것인가.

이대로 가면 법에 대한 도전이 일상화할 우려마저 있다. 이런 상황은 경제의 위기, 시장의 위기를 재촉한다. 편 가르기를 일삼고, 다수의 물리력이 법의 숨통을 죄는 나라에 두려움 없이 투자할 자본이 내자건 외자건 얼마나 있을까. 법에 맞춰 투자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떼법’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누가 감수할까.

▼자유민주 헌법 아래 살 수 있을까 ▼

모든 약자(弱者)에게 떡을 주겠다고 유혹하지만 무법천지에선 떡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법이 무너지면 약자부터 배가 더 고파진다. 법치보다는 대중의 인기를 앞세우는 포퓰리즘의 수혜층은 소수 권력집단뿐이다. 이들은 강자다.

여당이 절대다수당이 되고 노 대통령이 복권됐을 때 자유민주 헌법이 수호되고 모든 국민이 법의 보호 아래 안심하고 살 수 있을까. 초미의 관심사다.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