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문명에 대한 비판과 상상력이 돋보이는 SF 판타지 애니메이션 ‘판타스틱 플래닛.’ 사진제공 백두대간
우주 어딘가에 있는 ‘이얌’ 행성.
이곳은 ‘트라그’로 불리는 푸른 거인이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물고기 지느러미를 닮은 귀에 빡빡머리, 붉은 눈을 갖고 있다. 인간과 더 비슷한 존재는 ‘옴’(프랑스어로 인간을 뜻하는 ‘Homme’와 같은 발음). 하지만 옴은 트라그의 애완동물이다. 푸른 거인들은 개미처럼 작은 옴을 갖고 놀다 ‘동물을 죽게 놔 둘 수는 없다’며 동정심을 발휘하기도 한다.
‘판타스틱 플래닛’은 세상을 지배한다고 자부하는 인간문명에 대한 비판과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SF판타지 애니메이션. 팀 버튼 감독의 ‘혹성탈출’에 나오는 인간들은 적어도 한때 지구를 지배했던 우월한 종(種)이었다. 하지만 ‘판타스틱…’의 옴들은 음미할 과거조차 없는 미개한 존재일 뿐이다. 인간을 닮은 옴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낯설기보다는 무섭고 공포스럽다.
이처럼 영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아름다운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옴은 거대한 트라그의 발에 밟히지 않기 위해 도망다닌다. 또 주기적으로 펼쳐지는 ‘옴 소탕’ 작전에 무기력하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다. 현실 세계의 지배자인 인간이 위생을 이유로 벌이는 ‘해충 박멸 작전’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영화는 옴의 진화와 이로 인해 격렬해지는 옴과 트라그의 투쟁을 통해 한 문명의 성장과 쇠퇴에 관한 문명사적 접근도 시도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옴 소년 ‘테어.’ 어미를 잃고 애완용으로 키워진 테어는 트라그의 집에서 성장하면서 트라그의 문자, 과학, 명상법을 배운다. 트라그의 학습기계를 훔친 테어는 어느 날 탈출해 야생 상태에 있는 옴 동족을 찾아가 새로운 문명과 저항정신을 전한다.
이 작품은 25명의 스태프가 3년여 동안 1073개의 신을 한 장 한 장 그린 페이퍼 애니메이션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애니메이션에 비해 동작이 둔해 보이지만 회화적인 느낌은 훨씬 뛰어나다. 특히 극중 등장하는 기이한 생명체와 트라그의 회의 장면은 상상력의 절정이다.
1973년 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로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2001년 드림웍스의 흥행작 ‘슈렉’이 경쟁 부문에 진출했지만 빈 손으로 돌아갔고, ‘판타스틱…’은 지금까지 유일한 애니메이션 수상작으로 남아 있다.
4월9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 가.
김갑식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