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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훈의 續세상스크린]선배님, 그땐 몰랐습니다

입력 | 2004-03-30 17:58:00


1986년 겨울,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던 설악산의 밤 촬영현장 한켠의 모닥불 가에서 영화배우 이대근 선배님과 동료 선배님들이 둘러서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데뷔 2년차 신인배우였던 저는 손발이 꽁꽁 얼어 터져나갈 것 같았지만, 선배님이 계실 때는 모닥불 근처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그땐 분위기가 좀 그랬습니다. 지나치게 권위적이었던 우리의 80년대는 충무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몇 년간 제 소원이 촬영장에서 의자에 한번 앉아보는 것이었겠습니까. 그러던 즈음 한 선배님이 “너도 앉아라” 하시며 키 작은 낚시의자를 주셨고 전 조심스레 주위눈치를 살피다 처음으로 의자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촬영할 때, 연습 때와 다르게 움직여 카메라 거리 초점을 흐리게 할 때면 촬영감독님에게서 가차 없이 꾸중을 들었고, 선배님들로부턴 무슨 이유에선지 버릇없는 신세대 후배라는 소리를 들으며 눈총도 많이 받았습니다.

언론에선 ‘차세대 기둥’이라고 하며 저의 현재를 인정하지 않고 항상 미래만 얘기했습니다. 전 제발 그놈의 지긋지긋한 신인배우, 유망주 소리 좀 그만 듣고, 선배님 소리 듣고 싶었습니다.

선배님들이 참 부러웠습니다. 그렇게 몇 년 지내다 유학 갔다와 ‘투캅스’ 찍고 결혼하고 이래저래 좀 있다가 영화 현장에 와보니, 깜짝 놀랍게도 거의 대부분이 저에게 선배님이라 부르는 겁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물론 영화계가 타 분야에 비해 연령적으로 퍽 젊은 곳이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나 너무나도 얼마 안 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준비가 덜 됐는데, 전 아직도 막내 같은 데, 어느 새 훌쩍 선배가 돼 버렸습니다.

매번 촬영이 끝나면 제작진행 팀원들이 우르르 제게 달려와 의자와 난로를 갖다 주고 코트를 입혀주며 몸을 편하게 해줍니다. 촬영할 때 가장 늦게 불러주고 가장 일찍 끝나게 배려해 줍니다.

자연스럽게 촬영 진행의 중심은 제가 되고 아무도 꾸지람을 하지 않지만, 웬 일인지 마음이 편하지 않고 뭔가 자꾸 걱정이 앞섭니다. 고르지 못한 일기가 촬영에 지장을 주지나 않을까, 위험한 장면 찍을 때 혹 다치는 사람은 없을까, 예정된 개봉일정에 차질은 없을까 등등 크고 작은 걱정이 자꾸 드는 겁니다.

그래서 예전에 선배님들이 잔소리라고 느껴질 만큼 말씀이 많았나 봅니다. 제가 벌써 선배님들 마음을 헤아리고 있네요.

시간 참 빠릅니다. 전 아직도 막내 같은 데….

moviejh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