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월 증시안정기금(증안기금)이 14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증안기금은 지난해 말까지 증권, 은행, 보험, 상장사 등 출자 조합원에게 출자금의 120% 정도를 돌려줬다. 최근 4400억원의 현금 이익금도 나눠줬다. 이제 시가 1600억원 상당의 보유 주식을 처분하는 일만 남았다.
증안기금이 현재 보유한 주식은 삼성전자, SK텔레콤, 신세계, 현대자동차, 포스코, 국민은행 등 대형 우량주 14개종목. 매입단가는 350억원. 현재 시가로 환산하면 1600억원에 이른다. 1996년 청산 결정이 난 이후 주식을 사지 않고 팔기만 하면서 얻은 ‘어부지리’로 조합원에게 일단 체면치레는 한 셈이다.
그러나 증시 안정을 위해 설립된 증안기금 본연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싸늘하다. 1989년 종합주가지수가 1,000 선을 돌파한 뒤 1990년 들어 800 선까지 무너지자 정부가 꺼낸 카드가 바로 증안기금이었다. 1990년 당시 거래소 시가 총액이 84조원대인 점을 감안하면 4조8000억원의 증안기금은 시장의 흐름을 바꾸는 ‘큰손’이었다. 증시가 무너질 때마다 정부는 증안기금을 ‘전가의 보도(寶刀)’처럼 휘둘렀다.
시장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1990년 증안기금 출범 당시 800선대에 턱걸이를 하던 종합주가지수는 2년 후 600선대까지 밀렸다. 심지어 증안기금이 시장을 왜곡시키는 주범이라는 손가락질까지 받았다. 인위적인 시장 부양에 동원된 투신 산업의 위기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말도 들린다.
최근 총선을 앞두고 여야 정치 지도자들이 ‘연기금의 주식 투자 확대’를 앞 다퉈 흘리고 있다. 증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외국인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막연한 수급 논리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시장 논리에 따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연기금의 독립성과 투명성을 보장하는 시스템이 우선이다. 증안기금이라는 값비싼 수업료를 내고 얻은 교훈이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