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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천광암/외상 경제, 땜질 정책

입력 | 2004-03-30 19:01:00


누구나 처음 외상을 할 때는 ‘형편이 나아지면 갚아야지’ 하고 생각한다. 실제로 처음 몇 번은 성실하게 갚는다. 그러나 횟수가 잦아지면 외상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갚아야 한다는 생각도 흐려진다. 매달 되풀이해 빈 월급봉투를 손에 쥘 때는 이젠 외상을 털자고 다짐하지만 그 늪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다. 벌이는 뻔한데 ‘외상 맛’을 들인 씀씀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렸기 때문이다. 예외가 드문 ‘외상의 법칙’이자 ‘가불(假拂)의 경제학’이다.

월급쟁이뿐 아니라 정부도 ‘가불’을 한다. 예산이 일시 부족할 때 한국은행 등에서 잠시 빌렸다가 갚는 식이다. 그런데 올해는 유독 많다. 불과 석 달 만에 법정 한도인 8조원을 다 썼다고 한다.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서는 3배 이상 늘었다. 이러다간 총선이 끝나자마자 추가경정예산을 짜야 할 판이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17대 국회 개원 이후 추경예산 편성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이헌재 경제부총리에게 약속한 것을 보면 예정된 시나리오가 아닐까 싶다.

정부는 민간소비의 ‘가불’도 유도하고 있다. 자동차와 값 비싼 가전제품의 특별소비세를 올해 말까지 한시적으로 낮춘 사례가 대표적이다. 특소세 한시 인하는 내년에 차나 가전제품을 사려던 소비자들로 하여금 앞당겨 사게 하는 효과가 있다. 대신 올해 소비가 늘어나는 만큼 내년 소비는 줄어든다.

혜택은 미리 보고 비용은 나중에 치른다는 점에서 외상이나 가불은 빚과 일맥상통한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금융정책도 재정·내수 정책과 성격이 비슷하다. 정부가 10일과 24일 발표한 신용불량자대책과 가계부채대책은 만기가 짧은 헌 빚을, 만기가 긴 새 빚으로 바꿔주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문제 해결이 아닌 미뤄 두기다. 또 외상기간을 늘렸으니 외상강화정책인 셈이다.

‘가불·외상 정책’은 함부로 남용되지 않으면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 호경기에 들어올 돈을 미리 앞당겨 씀으로써 불경기의 고통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가계 빚 대책의 경우도 일시에 집중된 만기를 적절히 분산시키면 금융시장의 혼란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오늘의 비용을 나중으로 마구 떠넘기다 보면 내일의 경제는 ‘지급청구서’에 짓눌려 허덕이게 되기 십상이다.

가뜩이나 우리의 미래경제는 이미 과중한 ‘지급청구서’를 받아 놓은 상태다. 외환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쓴 공적자금 가운데 국가재정에서 갚아야 할 원금 49조원을 정부는 아직 한 푼도 갚지 못했다. 나라살림은 올해까지 7년 연속 적자다. 1999년 말 98조원이던 나라 빚은 2002년 말 133조원으로 불어났다. 넓은 의미의 나라 빚을 포함하면 이보다 몇 배나 많다는 주장도 있다. 국민연금은 현행 체계대로 연금을 지급하다가는 2047년에 적립기금이 바닥날 운명이다.

반면 앞으로 외상을 갚을 능력이 크게 좋아지리라는 희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산업 공동화(空洞化)는 심화되고 경제성장률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 경제의 객관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떻게든 ‘외상경제’를 개선해야 할 때이지 ‘총선용’ 의혹이 짙은 선심성 ‘가불정책’을 마구 쏟아낼 때가 아니다. 미래 소득의 원천인 기업투자의 활성화야말로 정부가 전념해야 할 일이다.

천광암 논설위원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