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되풀이해 의미를 새겨야만 비로소 체화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홍경택 작 ‘서재’. 사진제공 금호미술관
한때 ‘광수’라는 이름을 들으면 즉시 춘원 이광수를 떠올리는 사람이라야 교양을 갖춘 한국인 대접을 받은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다르다. 검찰총장 송광수를 비롯해 다른 ‘광수’들을 거명하는 사람은 많아도 정작 모든 광수 중에 원조 격인 이광수가 누군지조차도 모르는 한국 청년도 많다.
다른 나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미국의 고등학생에게 ‘셰익스피어’에 대해 아는 바를 이야기하라고 하면 절반은 ‘섹스어필’에 대해 열을 올린다고 한다.
세월 따라 ‘고전’이라는 전통적 권위가 퇴색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시대의 전범(典範)도, 보편적인 교양도 시류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문학작품이 문자와 교양의 상징이었던 시대, 이광수와 셰익스피어의 시대가 물러나고 있다.
책 대신 영상물, 독서 대신 연예와 스포츠가 새 시대를 호령하고 나선 지 오래다. 단 몇 주 만에 1000만명 관객의 주머니를 턴 영화가 있는가 하면 10년 동안 단 몇백 부의 초판을 넘기기도 힘든 양서(良書)도 태반이다. 바야흐로 영상시대의 도래가 문자시대의 종말을 재촉하고 있다는 거대한 이론도 득세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대로 실제로 책 없는 세상이 곧 도래할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곧 인류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가 이룩한 찬란한 문명은 문자라는 매개체를 활용한 성과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이성의 승리이다. 설령 인류가 변종되더라도 문자와 이성의 체계는 고스란히 전승될 것이다.
인생과 세상을 배우는 방법은 많다. 옛말대로 우선 보고(見) 듣는(聞) 것이 지식과 지혜의 원천이다. 견문이 넓을수록 생각이 깊어지고 바르게 행동할 수 있다. 그런데 보고 듣는다고 해서 깨치는 것은 아니다. ‘쇠귀에 경 읽기’라는 말이 있듯이,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려는 마음이 있어야만 견문과 체험을 마음의 양식과 생활의 지혜로 눌러 담을 수 있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아는 만큼 보인다.’ 새로 접하는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려면 그 정보를 분석하여 대뇌 속에 담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 프로그램을 구축하는 가장 전형적이고도 효과적인 방법이 지속적인 독서이다. 읽고 되풀이해 의미를 새겨야만 비로소 내 몸 속에 체화된 지식이 될 수 있다. 이성의 엄정함만으론 세상은 무미건조하다. 그러기에 감성적 자양분이 절제된 감성의 아름다움은 눈부시다. 그러나 절제를 잃은 감성의 난동과 폭거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정치권의 극한 대치, 선동적 구호, 인터넷 폭력, 촛불시위 등 감성의 시위가 난무하는 봄이다. 절망과 분노, 열정과 아름다움, 그 무슨 이유든지 거리에 나선 이 땅의 젊은이들이여, 그대 화려한 감성의 여정에 나서기 전에 잠시 귀를 빌려 주오. 그대가 추구하는 모든 것이 책 속에 있다오. 부르기만 하면 언제나 곁으로 다가와서 영원히 배신하지 않는 사람도 사상도 다름 아닌 책 속에 있다오.
안경환 서울대 법대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