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자료사진
나는 최근 종영한 TV드라마 ‘대장금’의 팬이었다. 빼어난 미인인 데다 잘생기고 든든한 민정호가 끊임없이 사모해주는 장금이가 부러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러웠던 것은 결코 망설이지 않고 의심하지 않은 채 전진하는 그녀의 삶의 태도였다. 장금이를 지탱해준 인생의 원칙은 한상궁(나아가 그녀의 어머니)의 뜻을 궁 안에서 다시 피어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씨 일가에 대한 복수의 시나리오도 그 원칙 안에서 나왔고, 의술을 펴서 백성을 이롭게 하겠다는 신념도 그 원칙에서 태어난 것이다.
상영 중인 다큐멘터리 영화 ‘송환’(감독 김동원)을 보고 나서 장금이를 떠올린 것은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하는 삶의 신념이 과연 내게 있는가, 아니 앞으로는 존재하게 될 것인가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송환’에서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지키고자 했던 이념은 영화 속 할아버지 한 분이 ‘동지’의 무덤 앞에서 “대답도 없고…풀 보고 어쩌고 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절규하던 말처럼, 어쩌면 대답도 실체도 없는 허망한 것이다. 하물며 당과 사회와 국가야 말해 무엇 하랴. 이념은 그런 조직에 편입되는 순간 내부에서 숱한 동상이몽들을 낳으며 수만 번이나 변질되지 않던가.
이 영화는 ‘할아버지’들이 그 오랜 세월을 전향하지 않고 버티도록 해준 것이 이념이 아니라 전향공작의 폭력성 자체였으며, 고비를 넘어가는 힘은 이성이 아니라 “얼마나 이를 가느냐”라고 말한다. 그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분노와 증오는 때로 사람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 그러나 그 위에 세워진 삶이란 취약하고 불안정하며 그 대상을 잃어버리는 순간 무력해진다.
‘송환’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뼈만 앙상한 아흔 넘은 노모가 20여년을 복역한 아들을 기다려 만나는 두 개의 에피소드였다. 오히려 ‘할아버지’들을 버티게 만든 힘은 그렇게 언젠가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믿음을 닮은, 보다 근원적인 성질의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하면 그것은 자신을 길러주고 믿어주고 임무를 주어 그 존재 가치를 확인해 준 체제를 부정하지 않기 위한 절박한 노력에 가깝다. 그 체제에 대한 믿음이 부정되는 순간, 스스로의 존재 역시 부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들에게 ‘장군님’이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극장을 가득 채운 젊은 관객들이 끊임없이 훌쩍이고 분노의 한숨을 내쉬는 반응을 접했다. ‘대장금’에 열광하고 ‘송환’에 눈물짓는 젊은 관객들을 보며, 나는 우리가 어쩌면 목숨을 걸 만한 신념이 존재하는 삶에 대해 경외와 동경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나가는 것에도, 2년 전 ‘Be the Reds’ 티셔츠를 입고 거리로 뛰쳐나갔던 것에도 그런 동경은 깃들어 있다.
소위 ‘보수’와 ‘진보’를 양분하여 서로를 차단하고 비난하는 것도 어쩌면 사상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그런 믿음을 갖고 싶은, 또는 믿음을 주는 대상을 갖고 싶은 욕망의 표현은 아닐까. 바꿔 말하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삶의 신조를 얻기 어렵고 평생 그것을 지니고 살아가기엔 너무나도 돌아볼 것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방증인 것 같기도 하다.
유희정 정신과전문의 경상대병원 hjyoomd@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