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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영화파일]‘고티카’의 할리 베리

입력 | 2004-04-01 17:34:00

사진제공 무비&아이


많은 사람이 할리 베리를 기억하기 시작한 것은 ‘X맨’부터라고 하겠지만 그건 짐짓 점잔을 피우려는 것일 뿐이다. ‘X맨’에서 그는 그저 여러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었다. 게다가 토네이도를 일으키는 초능력의 여인 ‘스톰’은 극중에서 그리 비중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성인 남성 영화 팬들의 머릿속에 그가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스워드 피쉬’부터였을 것이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그는 확실한 ‘가슴 노출’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단 세 컷의 토플리스 장면에 대한 보상으로 그가 받은 개런티가 50만달러였다는 점도 당시 화제였다. 우리 돈으로 6억원. 참고로 국내에서는 여배우들이 노출에 따라 따로 출연료를 받지는 않는다. 베드신 대역 연기자의 출연료는 70만원선.

‘스워드 피쉬’ 때까지만 해도 할리 베리는 일종의 ‘들러리 여배우’였다. 주인공을 빛내 주기 위해 혹은 드라마를 좀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양념’으로 등장하는 여성 연기자란 얘기다. 이런 여배우는 할리우드에 흔하다.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가까스로 ‘진짜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한 ‘몬스터’의 샤를리즈 테론 역시 숱한 영화에서 ‘병풍’ 역할로 만족해야 했다.

지금이야 꽤나 탄탄한 연기자로 알려진 애슐리 주드 역시 단독 주연은 데뷔 후 한참 뒤에야 가능했다. 백인 여배우가 이 정도라면 코발트색 피부의 할리 베리는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X맨’ 전까지 무려 15편의 작품에 출연했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워런 비티 감독 주연의 ‘불 워스’ 같은 의미 있는 영화에서조차 인상이 남는 배우는 워런 비티였지 할리 베리가 아니었다.

‘들러리’, 혹은 ‘병풍’ 연기에서 그녀가 연기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바로 ‘몬스터 볼’에서였다 마크 포스터 감독 연출에 빌리 밥 손튼과 함께 연기한 이 영화에서 할리 베리는 남편의 사형을 집행한 백인 교도관과 사랑에 빠지는 흑인 하층민 여성 레티샤 역으로 나와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이 영화의 백미는 아이마저 교통사고로 잃은 후 통곡을 하다가 손튼과 격정적으로 섹스를 하는 장면. 그때 노출됐던 그의 가슴은 ‘스워드 피쉬’ 때와는 달리 전혀 야하지 않았다.

최신작 ‘고티카’에서 그는 범죄행동분석가 미란다 역으로 새로운 연기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시작된 지 20여분 뒤 도끼로 남편을 잔혹하게 살해한 이상 성격의 살인마로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란다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소녀 유령 탓이라고 악을 쓰지만 정신병동 안에서 그녀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뭐, 그건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 특히 그녀에게 연정을 품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조차 믿지 않는 듯이 보이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만큼은 철석같이 그녀의 무죄를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소 생각지도 못했던 결론으로 미란다는 혐의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이걸 반전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감독 마티유 카소비츠의 프랑스인다운 엉뚱함이라고 해야 할지 조금 헷갈린다. 그 판단은 관객 몫이다. 2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