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 인수합병과 구조조정의 회오리 속에서 야근과 연장근무를 밥 먹듯이 하는 샐러리맨의 우울한 모습은 고도산업사회의 어느 국가에서나 피할 수 없는 풍경이 됐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화이트칼라의 위기/질 안드레스키 프레이저 지음 심재관 옮김/344쪽 1만2000원 한스미디어
“1990년대가 오면 근로자들은 일주일에 22시간씩만 일하게 될 겁니다.”
경제부흥기인 1960년대, 미국 상원 소위원회에 출석한 한 노동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한 해 근무일수도 6개월에 불과하게 되죠. 대략 38세쯤이면 정년을 맞아 집에서 풍요로운 여가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한국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예언 중 ‘38세 정년’만 현실에 가까워진 듯하다. 옆 책상에서 근무하던 동료의 모습이 어느 날 보이지 않고, 사라진 사람의 업무를 동료들이 나누어 가지며, 이윽고 야근이나 휴일근무도 예삿일이 된다. 나아가 어제까지 ‘적수’였던 회사와 ‘우리’ 회사가 하나가 되고, 통합된 부서에서는 황량한 칼바람이 분다.
오직 한국만의 사정이 아니다. 이 책에 따르면 미국의 ‘화이트칼라’들도 비슷한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사무자동화에 따라 생산성이 높아지는데 근무시간은 왜 자꾸 늘어만 갈까? 왜 실직자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사람의 수가 나란히 늘어나는 걸까? 일은 많아졌는데 왜 임금은 그대로일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저자는 그 이유를 1980년대 초반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경제정책에서 찾는다. 미 연방정부와 각 주 정부는 기업합병과 인수에 대한 간섭을 없애버렸다. 사냥꾼의 표적이 된 기업은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채를 줄이는 데 힘을 쏟았다. 엄청난 비용 삭감과 정리해고, 후생복지의 축소가 뒤따랐다. 사냥감이 된 기업의 사정은 당연히 더 나빴다.
기업이 충분한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면 왜 직원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못하는 것일까. 저자는 ‘자본주의의 미래’를 저술한 레스터 서로의 분석을 인용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성장기에는 직원들의 헌신을 끌어내기 위해 기업마다 ‘보상의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칼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헌신을 끌어내기 위한 새로운 도구로 ‘공포’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구직을 바라는 실업자 군이 줄을 서고 있는 한 이제 피고용자들은 자신이 얼마든지 대체가능한 부품임을 알게 됐다. ‘말 잘 듣는 게 최고’가 된 것이다. 게다가 첨단 휴대 사무기기의 보급은 퇴근 후, 주말 휴가지에서도 업무를 계속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분석 자체는 평이한 데 비해 저자가 이 책의 장점으로 스스로 들고 나온 무기는 수많은 사람을 인터뷰해 얻은 생생한 ‘현장성’이다. ‘커피숍, 식당, 부엌, 일과 후, 주말, 이른 아침, 온라인’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대화’한 근로자들의 육성이 페이지마다 담겨 있다. 휴가지에서 보트를 타면서도 휴대전화로 업무를 처리하고, 점심시간에도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면서 책상을 떠나지 못하며, 업무 때문에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어 가슴앓이를 하는 평범한 미국인들의 초라한 모습은 우리와 다를 것이 없다.
저자가 권하는 해결책 역시 초라함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주당 근무시간을 줄였는데도 생산성이 증가한 유럽 몇몇 기업의 사례를 슬쩍 언급하더니, ‘웹 사이트를 통해 직원들과 의견을 나누고 결속을 다져라’는 권고 정도를 내놓고 있을 뿐이다. ‘최고경영자의 보수를 동결해야 기업들이 화이트칼라 피고용자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제안은 결국 이해 당사자의 ‘양심적인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일 뿐이다. 이를 이끌어낼 동기유발 장치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원제 ‘White Collar Sweatshop’ (2002).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