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가을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서 연극 ‘흉가에 볕들어라’(극본 이해제·연출 이기도)의 공연포스터를 보고 ‘공포 연극’ 인가하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우연히 이 연극을 혼자 보게 됐고 나도 모르게 무대에 흠뻑 빠져들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귀신들의 블랙코미디는 욕망에 갇혀 서로 죽고 죽이는 인간들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한국의 전통적 가신(家神) 신앙에서 모티브를 따온 이 연극은 ‘한국 연극사에 남을 만한 드라마틱한 희곡’이란 평을 받았다. ‘흉가…’가 대학로의 소극장을 떠나 11일까지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 대극장 무대에 오른다.
그때와는 무대부터 달라졌다. 우선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으로 표현됐던 남부잣집 흉가는 무대를 꽉 채우는 울창한 대나무 숲과 갈대밭으로 바뀌어 신비함을 더했다. 공연이 시작되자 목어(木魚)가 흉가에서 빠져나와 객석 위로 유유히 날아가고 노래하는 업구렁이는 솟아올라 천수관음상처럼 부드럽게 춤을 춘다. 또한 악사들은 업두꺼비로 변신해 대숲에 숨어 연주하는 등 대극장 무대에 맞춰 시청각적 효과를 업그레이드 했다.
조왕부인(부엌신), 삼승할망, 바래기(지붕신) 등 각자 사연을 담은 귀신들의 캐릭터 연기도 한층 강화됐다. 탐욕스러운 남부자의 며느리 ‘변소각시’(유수미)가 땅문서를 뺏기 위해 머슴인 파북숭이(한명구)와 변소에서 정사를 벌이는 장면은 추잡한 인간욕망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화려한 무대와 음향효과로 인해 되레 대사전달이 잘 안됐고, 인물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져 소극장에서 맛보았던 극적 밀도감은 다소 떨어졌다. ‘거대한 흉가 속에 파묻힌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연출자의 설명이지만 무대의 부분적 변환을 통해 개별 사건을 클로즈업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연극은 생존인물인 파북숭이와 남부자 귀신이 30년 전 하룻밤 사이 목숨을 잃은 식솔들의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땅문서와 재물에 대한 욕심, 아이를 못 낳은 여인의 질투, 자신을 소처럼 취급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 이들은 각자의 욕망 때문에 서로를 죽였고, 죽은 뒤에도 생전의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흉가’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상징한다. 사람다운 사람이 살지 않는 이 세상도 결국 흉가와 다름없다. 욕망을 부둥켜 안은 채 매일매일 악몽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과연 귀신일까, 사람일까.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