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범죄의 재구성’에서 1인 2역으로 떠벌이 사기꾼과 내성적인 책방주인을 연기한 박신양. 그는 “지금까지 영화에서 중심이 밑에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면 이번엔 ‘중심이 떠 있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권주훈기자 kjh@donga.com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야.”
15일 개봉하는 영화 ‘범죄의 재구성’에서 천부적 사기꾼 창혁은 자신과 몸을 섞은 ‘구로동 샤론스톤’ 인경(염정아)에게 이런 말을 내뱉는다. 사실 이 영화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게 시시껄렁한 듯한 이 말이다. 인경에게 ‘님’이었던 창혁은 돌연 생판 ‘남’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창혁은 자신의 죽음을 가장한 뒤 성형수술을 통해 내성적 책방주인이자 그의 형인 창호로 변신, 경찰을 따돌린다.
○‘님’에서 ‘남’으로 돌변…연기 재구성
한국은행을 터는 5인조의 기상천외한 사기 행각과 지능게임을 담아낸 영화 ‘범죄의 재구성’은 배우 박신양(36)이 진짜 ‘재구성’한 영화다. 이 영화는 당초 서로 다른 배우가 창혁과 창호 형제를 연기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계획이 바뀌어 “1인 2역을 하겠다”는 박신양의 강한 의지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5시간 동안 라텍스를 붙이며 얼굴을 바꾸는 특수 분장의 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다.
“만약 다른 배우를 썼더라면 관객은 깜짝 놀랐을 거예요. 하지만 동시에 허무했을 겁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성형수술의 허무함’이 아니죠. (웃음) ‘쨘, 놀랐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관객이 ‘1인2역’임을 아는 상태에서도 영화는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죠.”
○“오시이잇”등 대사 40% 애드리브
이 영화 속 박신양은 ‘편지’나 ‘약속’, ‘인디안썸머’에서의 그가 아니다. 박신양은 거칠고 천박한 떠버리가 됐다. 그러나 여전히 뭔가를 속내에 안고 있다가 토해낸다.
그는 캐릭터를 ‘창조한다’기보다는 ‘창조적으로 복사하는’ 쪽이다. 떠들썩한 창혁의 캐릭터는 매니저의 친구 중 한 사람을 옮겨온 것. “몽타주도 후진 게…(얼굴도 못생긴 게)”라며 상대를 단번에 깎아내리는 창혁의 냉소적 대사는 고교시절 그의 친구가 자주 쓰던 말을 되살린 애드리브다. 그는 음울한 형 창호의 캐릭터를 잡기 위해 서울 홍익대 인근의 헌책방들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한 사람을 발견해 며칠 동안 관찰했다.
“책방 주인에게 물었어요. 왜 이 일을 하죠? 무슨 생각을 하죠? 술은 많이 먹나요? 세상에 대한 생각은 뭐죠? 그가 말하더군요. ‘난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없이 그저 걸구치는 것(거치적거리는 것) 없이 사는 게 소원이야.’ 안개 속에 서있는 것 같은 창호의 캐릭터는 거기서 나왔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창혁의 대사 중 40%가량은 박신양의 애드리브다. 창혁은 경찰에 쫓기던 중 갑자기 “오 시이잇(Oh shit), 오 시이잇”을 연발해 한껏 고조된 긴장을 일순간 풀어헤쳐 버린다. 인경의 얼굴을 만질 때 형성되는 폭발할 듯한 성적 긴장도 “아, 피부가 매낀매낀하네”하는 그의 멘트로 공중 분해된다. 웃음은 이때 핵폭발한다.
○“베드신 싫어하고 눈요기용 안찍어”
“잘 나가다가 주인공을 별안간 죽이는 한국영화가 많죠. 꿀꿀하거나(암울하거나) 패배적인 분위기로 흐르고…. 전 이 영화의 새롭고 힘든 시도가 좋습니다. 통쾌하고 후련한 거 말이죠.”
그에게 “인경과의 베드신이 이뤄질 듯 말 듯 하다가 결국 불발로 끝난다. 왜 관객을 아쉽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영화에 꼭 필요하지 않다. ‘약속’에서도 원래 베드신이 있었지만 안 찍겠다고 했다”며 “난 베드신을 싫어한다”고 말했다.
박신양은 “사기 치는 영화는 첫 출연”이라면서도 “어차피 영화란 게 다 ‘사기’ 아닌가요?”하고 되물었다.
“전쟁영화는 전쟁을 가장한 사기, 애정영화는 애정을 가장한 사기…. 오히려 사기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일수록 배우의 연기에 대한 관객의 진솔한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업계 전문용어’ 알고보면 재미 두배▼
“나 수술 당했다.” “4년 전에 내가 접시 돌린 놈이….”
영화 ‘범죄의 재구성’에는 한국어 평균 실력으로는 알아듣기 어려운 용어들이 스크린을 날아다닌다. 대부분 사기꾼들이 자신의 말과 행동을 감추기 위해 사용하는 은어들.
시나리오 작업을 겸했던 최동훈 감독은 3년 동안 경마장과 전국 방방곡곡의 도박판을 찾아다녔다. “3번 말(馬)에 걸어. 내가 청진기 대면 바로 진단 나와(‘내가 가늠해 보니 가능성이 높다’는 뜻)” 등의 말을 어깨너머로 주워들으며 ‘업계 전문용어’를 익혔다.
이 영화에서 은어는 영화적 리얼리티를 높이는 장치가 된다. 다음은 ‘범죄의 재구성’에 등장하는 ‘사기꾼의 은어’들.
▽접시 돌리다=사기 치다 ▽수술하다(수술 당하다)=사기를 치다(사기 당하다) ▽영화배우=사기꾼 ▽레지던트=아직 완전히 무르익지 않은 사기꾼 ▽전문의=농익은 사기꾼 ▽시추에이션이 좋다=(사기) 활동상황이 좋다 ▽필드=사기꾼들의 활동무대 ▽작업 중=사기를 치고 있는 중 ▽취직하다=사기 모의에 합류하다 ▽50개=50억(1개=1억) ▽월급날=사기를 치기로 한 D데이 ▽똥구멍 맞추다=뒷거래를 하다 ▽저금통=사기를 치고 있는 대상 ▽시놉시스=사기작전 ▽독고다이=단독으로 일을 진행하는 사기꾼 ▽이력서=사기를 친 경력 ▽불알이 쪼그라들다=사기 일선에서 은퇴하다 ▽추위 타다=겁을 먹다 ▽졸업하다=출소하다 ▽몽타주=얼굴 ▽빠꼼이=똑똑하고 눈치가 빠른 자 ▽궁짜가 끼다=가난하다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의 사기꾼 식 비유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다, 한번 마셔볼까?=‘작전대상이 나타났다. 작업 개시’란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