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가 함께-록펠러 일가 4대가 한자리에 모인 1932년의 역사적 기념사진. 왼쪽부터 가문의 명예를 드높인 록펠러 2세, 세계 최고의 부를 쌓은 석유왕 록펠러 1세, 그해에 태어나 채 돌도 되지 않은 4세대 로드먼 록펠러, 3세대의 대표주자로 대통령을 꿈꿨던 넬슨 록펠러.사진제공 씨앗을 뿌리는 사람
◇록펠러家의 사람들/피터 콜리어·데이비드 호로위츠 지음 함규진 옮김/903쪽 3만3000원 씨앗을 뿌리는 사람
협박과 매수를 통해 거대 독과점 기업을 구축한 아버지, 정계 거물 딸과의 결혼 그리고 자선사업과 문화사업을 통해 가문의 오명을 씻어내려 한 아들, 2대에 걸쳐 축적된 부와 권력을 바탕으로 대통령을 꿈꾼 손자, ‘가문의 영광’에 염증을 느끼고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증손자들….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 일가의 4대를 추적한 이 책은 한국 재벌의 현대사가 그대로 오버랩된다. 저자들은 록펠러와 철도왕 밴더빌트, 강철왕 카네기, 금융왕 JP 모건 등 미국판 재벌의 탄생과 성장에 감춰진 협잡과 음모, 매수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창업주인 존 데이비슨 록펠러 1세(1839∼1937)는 비밀 카르텔 형성과 수송업계의 리베이트 제공(‘리베이트’라는 프랑스어가 영어로 대중화된 것은 이때다), 정치권 매수, 경쟁업체 협박 등을 통해 1881년 미국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95%를 독점함으로써 정유업을 장악한다. 문어발식 확장, 중소기업 기술 빼앗기, 주가 조작 등 오늘날 일부 한국 재벌에 쏟아지는 비판은 고스란히 그의 장기였다. 심지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 부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든지 간에 그 부를 쌓으며 저지른 악행을 보상할 수는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록펠러는 여느 졸부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비즈니스에서는 냉혹했지만 사생활에서는 근검 절약과 근면 성실의 화신이었다. 그는 평생 일기를 쓰듯 개인 회계장부를 썼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수입의 10분의 1 헌금’이란 원칙을 지켰다. 술, 담배, 여자를 멀리하는 금욕적 삶을 살았으며 가족을 최우선시했다.
그의 문제는 자신이 벌어들인 재산보다 주체 못할 만큼 불어나는 재산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그가 사실상 은퇴한 1897년까지 그의 재산은 2억달러였다. 그러나 1913년에는 그 돈이 10억달러로 불어났다. 자동차산업의 발달로 주가가 급등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890년을 기점으로 왕성해진 그의 기부활동은 사실상 돈벼락에 깔려 죽지 않으려는 자구책에 가까웠다.
그의 외아들 록펠러 2세(1874∼1960)는 더 철저한 금욕주의자였다. 그는 대학 2학년 때까지 춤추는 것이 도덕적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했고, 40대까지 아버지에게서 용돈을 받아썼다. 그의 평생은 예수의 삶을 연상시킬 정도로 오로지 아버지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종교적 사명감으로 점철됐다. 그는 아버지를 설득해 자선사업, 의료사업, 교육사업, 문화사업 등에 5억달러를 출연한다. 이는 그가 물려받은 재산과 같은 규모였다.
4명의 손자는 이를 발판으로 미국 정재계를 장악한다. 아시아전문가가 된 형 록펠러 3세(1906∼1978)를 제치고 ‘패밀리’의 적통을 물려받은 차남 넬슨(1908∼1979)은 대통령보좌관, 뉴욕주지사, 부통령을 역임하며 백악관행을 꿈꾼다. 3남 로렌스(94)는 항공업과 원자력 사업에 뛰어들고 초기 환경운동의 중심적 인물이 된다. 4남 윈스롭(1912∼1973)은 아칸소주지사가 되고 막내 데이비드(89)는 체이스맨해튼 은행의 지배자가 된다. 그러나 ‘공화당의 케네디’가 됐을지도 모를 넬슨은 오히려 그 진보성 때문에 좌절하고 다른 형제들도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역사의 뒤로 밀려난다.
수많은 증손자는 록펠러가의 일원임을 오히려 낙인처럼 껴안고 살아간다. 개중에는 록펠러 4세(제이 록펠러)처럼 상원의원(웨스트버지니아주)으로 활약하는 이도 있지만 식당차 주인으로 살거나 남태평양으로 도피했다가 식인종에 잡아먹히는 이까지 나온다.
이 책은 그저 한 가문의 전기가 아니다. 숭고한 청교도적 가족윤리와 비즈니스 세계의 냉혹한 ‘정글의 법칙’이 공존하고 주체하기 힘들 만큼 쏟아지는 돈의 권능 앞에 쑥스러움(고립주의)과 우쭐함(예외주의)이 복합된 록펠러가의 역사는 바로 미국의 분열된 자화상이기도 하다. 미국적 전통이 어떻게 형성됐는가에 대한 저자들의 이런 정신분석학적이고 계보학적인 접근이야말로 1976년에 씌어진 이 책이 지금도 여전히 숨가쁘게 읽히는 이유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