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말 지리산 지역에서 전개된 대규모 공비토벌 작전으로 생포된 빨치산들. 국군의 ‘잔비’ 소탕작전은 5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從軍落穗-智異山 原子時代에 原始戰▼
사람이 두더쥐 생활을 한다고 하면 괴이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현실이 二十세기에 나타나고 있다. 소위 그들 공비가 말하는 ‘승리를 위한 투쟁방법’으로 사람의 눈이 미치지 않는 장소를 택해서 굴을 파서 은신하는 것이다.
三월十九일 智異山 般若峰에서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는 OO부대 소속 朴相玉 中士의 발에 찔끈히 밟히는 것이 있었다. 냄새를 막기 위해 雨衣로 싸놓았지만 사람의 변(便)이었다. 그는 곧 P대장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주변 일대를 수색했다. 二十야드 떨어진 곳에 바위가 솟아 있고 무심코 바위를 밀어보니 공비의 ‘아지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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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중사는 단신 동굴 속에 진입해 공비 三명을 사살하고 보니 그중 하나가 李鉉相의 후계자로서 金日成과 직접 무전을 교신하면서 在山공비를 지휘해 오던 ‘조국出版社 총책’ 朴榮發이었던 것이다.
▼공비 토벌작전 막바지… 지리산 ‘血花 만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로 6·25전쟁은 일단 마무리됐다. 그러나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과의 ‘전선 없는 전쟁’은 55년경까지 계속됐다.
위 기사의 박영발은 당시 ‘남조선 인민유격대 전남도당 위원장’으로서 빨치산의 핵심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이 변변한 호위부대조차 없이 수색대에 발각된 것을 보면 휴전 후 빨치산 세력이 얼마나 급속히 약화됐는지 알 수 있다.
51년 말 ‘100일 공비토벌작전’으로 위축되기 시작한 빨치산은 52년 8월 박헌영 등 북한 내의 남로당계가 ‘정권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등 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혐의를 받고 체포된 데 이어, 53년 9월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까지 사살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보았다.
이들은 지하 토굴로 숨어들었지만 국군은 53년 겨울 ‘완전소탕’에 나섰고, 이 작전으로 박영발, 방준표, 조병화 등 거물급 인물들이 사살 또는 생포되기에 이른 것이다.
50년 9월 1만명에 이르던 빨치산은 52년 2000여명, 53년 800여명에서 54년 140명, 55년 54명으로 급감했다. 그 뒤 빨치산의 역사는 63년 체포돼 최근 숨진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 할머니처럼 산간을 떠돌다 민가에 출현해 먹을 것을 훔쳐가는 ‘망실(亡失) 공비’ 수준이었다.
이런 처절한 역사의 지리산은 55년 4월 입산통제에서 해제됐다. 소설 ‘남부군’의 작가 이태는 “지리산을 찾는 젊은 관광객들은 불과 50여년 전 그들과 비슷한 청춘들이 이 산에서 스러져간 역사를 그저 까마득한 전설로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