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이냐, 연나라에서 귀순한 장수 동수의 묘냐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황해도 안악 3호분 묘주인의 화려한 초상. 왕릉급인 묘주인의 좌우에 그려진 관리의 직함은 기실, 소사, 성사, 장하독으로 왕의 신하냐 귀족의 가신이냐는 논란을 빚고 있다. 이 논란은 고구려가 왕 중심 국가였나, 귀족중심 국가였나의 논란과 연결된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고구려는 어떻게 다스려졌는가. 왕이 나라를 다스린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귀족의 정치적 힘은 또 어떠했을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는 왕을 중심으로 하여 왕 재위(在位) 기간의 사건을 싣고 있다. 그리고 사건을 설명하는 과정에 연나부(연那部)와 비류부(沸流部) 등 부(部)가 언급된다. 중국 역사책인 ‘삼국지(三國志)’는 고구려가 연노부(涓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 등 5부로 구성돼 있다고 전한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져서 주몽을 배출한 계루부에서 왕위를 차지하게 됐다고 한다.》
고구려는 어떻게 다스려졌는가. 왕이 나라를 다스린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귀족의 정치적 힘은 또 어떠했을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는 왕을 중심으로 하여 왕 재위(在位) 기간의 사건을 싣고 있다. 그리고 사건을 설명하는 과정에 연나부(¤那部)와 비류부(沸流部) 등 부(部)가 언급된다. 중국 역사책인 ‘삼국지(三國志)’는 고구려가 연노부(涓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 등 5부로 구성돼 있다고 전한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져서 주몽을 배출한 계루부에서 왕위를 차지하게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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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귀족 중 하나? 아니면 실질적 통치자?
고구려의 정치에 관하여 삼국사기나 삼국지 사료의 내용을 어떻게 취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나온 주장이 부체제(部體制)설과 집권체제(執權體制)설이다.
부체제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삼국사기나 삼국지에 언급된 부를 하나의 정치집단이라고 파악한다. 그리고 그 부가 고구려 초기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각자 독자성을 갖고 운영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각 부의 대가(大加)들로 구성된 제가회의(諸加會議)가 왕권을 견제했으며, 상가(相加)가 제가회의 의장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 부체제설은 고구려의 정치구조가 왕을 정점으로 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왕실도 5부 가운데 하나의 단위정치체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들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중국 랴오닝성 덩다현에 있는 고구려 연주성(백암성)의 당당한 위용은 강력한 왕권을 시사한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반면 집권체제설은 고구려 정치에서 귀족보다는 왕의 역할에 더 주목한다. 이들의 기본적인 입장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초기 기사를 적극 채택해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고구려 초기의 왕은 이미 정치의 중심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료에서 볼 수 있는 부는 단위정치체가 아니라고 본다. 집권체제설은 부가 왕 중심의 국가 체제 안에 편성된 것이며 각각 지방통치 단위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또 이들은 왕 아래에 관직체제가 갖추어져 있었고 왕이 이들을 지배했다고 본다.
고구려에서 가장 먼저 국상(國相)이 된 사람은 2세기 초 신대왕 때의 명림답부(明臨答夫)였다. 명림답부는 신대왕 즉위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또 한 사람의 국상 을파소(乙巴素)는 신대왕 다음 왕인 고국천왕을 도와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했다. 이처럼 왕은 관직을 지배하고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따라 상가는 제가회의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국상은 왕에 속한 관료적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본다.
●왕권 강화되며 선비족, 말갈족도 직접 지배
해뚫음금동관의 세발 까마귀(삼족오) 장식. 이 금동관은 왕이 썼던 것일까, 귀족의 소유였을까.
고구려는 어떤 사람들을 다스린 것인가. 고구려 초기 사회는 기본적으로 촌(村)과 곡(谷)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촌과 곡에 사는 사람들이 고구려의 기본 주민들이었으며, 이들은 곡민(谷民) 성민(城民)으로 분류되어 조세와 징발의 대상이 되었다. 고국천왕이 진대법을 실시해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곡식을 내주었다고 했는데 그 대상이 이들이었을 것이다.
고구려에는 이들 곡민이나 성민과 구별되는 다른 종족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선비족이나 말갈족인데 고구려에 복속됐으며 평상시에는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하다가 전쟁과 같은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고구려에 징발되었다. 대체로 고구려 초기 사회는 곡민과 성민이 직접 지배의 대상이 되었고, 이(異)종족이나 변경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간접 지배를 받았다.
4, 5세기에 이르러 왕권이 강화되면서 통치체제도 전반적으로 변화된다. 율령 반포에 따른 체제 정비의 결과다. 고구려 주민에 대한 지배도 달라졌는데, 초기 사회에서 차별적으로 분류되던 이종족들도 이때쯤 고구려 주민으로 파악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대규모의 성곽을 축조할 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주민을 직접 지배하면서 중앙에서는 수사(守事)와 재(宰), 태수(太守)와 같은 지방관들을 파견했다.
고구려가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는가는 여전히 흥미롭고 관심이 가는 문제다. 이 과정에서 삼국사기나 삼국지에 대한 해석이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금경숙 고려대 강사
▼中삼국지…왕-귀족 정치적 권한 대등▼
중국의 삼국지는 고구려 각 부의 대가(大加)가 가신(家臣)과 비슷한 사자(使者) 조의(조衣) 선인(先人)을 두었으며, 왕가(王家)에도 역시 사자 조의 선인이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물론 대가 밑에 있는 가신과 왕가의 가신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대가는 가신의 명단을 왕에게 보고해야 했고, 왕과 대가가 회합할 때도 양자의 가신은 같은 줄에 앉지 못했다고 한다.
부체제설은 왕가의 가신을 대가들도 스스로 두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즉 왕의 정치적 권한이 귀족의 권한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 연맹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반면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건국 초기부터 활발한 군사행동을 벌이는 사료가 보인다. 압록강 유역의 소국(小國)뿐 아니라 주변 다른 종족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기록이다. 동명성왕은 말갈(靺鞨)족을 복속시켰고, 유리왕은 선비(鮮卑)족과의 전투에서 전략적 승리를 거둔다. 또 대무신왕은 군사를 동원해 부여(夫餘) 정벌에 나선다. 부여 정벌은 실패로 끝났으나 부여의 왕을 살해해 그 내부를 분열시키는 데 일단 성공했다. 집권체제설은 이처럼 고구려가 건국 초기부터 대규모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왕이 가진 정치적 권력이 강한 데서 비롯됐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