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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준 칼럼]사회주의 ‘늦꽃’

입력 | 2004-04-12 18:25:00


모레는 남에선 총선의 날이고 북에선 ‘인류 공동의 가장 경사스러운 명절’이라는 태양절(김일성 생일)이다. 죽었으되 살아있는 우상의 생일에 유엔인권위원회는 대북 인권결의안을 표결하고, 한국 정부는 기권으로 눈감기로 했다.

북한의 인권 상황은 세계 최악이다. 자유를 따지는 건 사치이고, 절대다수 주민의 동물적 생존마저 어려운 절대가난이 곧 절대적 반(反)인권이다. 만인이 허기진 평등은 세계의 잣대로는 총체적 불평등이다. 닫힌 땅의 인민해방은 세계 속의 인민고립이다. 이 지경에 민주 반민주를 말하랴.

▼모두 배고픈 평등 견딜 수 있을까 ▼

1960년대까지는 북이 남보다 잘살던 때가 있었다. 1970년 1인당 국민소득은 고만고만한 200달러대였다. 2002년 북은 762달러, 남은 1만13달러다.

북한 주민의 굶주림 평준화는 우상 세습 독재, 폐쇄적 사회주의, 비타협적 주체사상이 부른 재앙이다. 핵 위협 하나로 정권 살려 달라고 미국에 구걸하니 ‘주체’는 사망신고한 지 오래지만.

한국은 정치에서 자유민주주의, 경제에서 개방형 시장경제, 안보에서 한미동맹의 길을 걸어 1만달러까진 왔다. 반세기에 경제를 100배 키운 체제의 실체다. 압축성장 과정에 적잖은 왜곡이 생기고 부패와 빈부격차 등 숙제가 많지만 민주화, 인권 신장, 보릿고개 탈출이 가능했던 동력이 이 삼각체제다. 이를 뒷받침한 건 법치(法治)다.

그런데 이 1만달러체제가 촛불전쟁에 고전하고 있다. 시민혁명, 사회주의, 친북반미로 다 요약할 순 없지만 이런 촛불이 성장체제의 촛불을 위협한다. “함성이 헌법”이라는 엽기구호까지 파고 든다.

기막히게 상징조작된 약자(弱者)증후군이 이런 체제 내전(內戰)을 확산시킨다. 대통령이 앞장서 약자로 자처하며 줄기차게 강자와 약자를 편 갈랐다. 나보다 잘나고 잘사는 인간들이 있는 한 ‘나는 약자’라는 감성적 다수가 체제와 법을 깨는 파괴력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 정부 들어 먹을 걸 새로 만들기보다 남은 것의 재분배 투쟁이 조장되고, 기업 소유권의 작위적 제한과 경영권의 인위적 배분이 시도된다. 교육에서 경쟁을 거부하고 명문을 악으로 몰며 대학까지 평준화하라는 목소리가 커진다. 세계적 경쟁은 꿈도 꾸지 못할 열등생 양산형 평등주의가 교육현장을 휩쓴다.

자본주의를 ‘질곡’으로 규정하는 정당이 급부상한다. 사회주의적 해방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사적 소유권을 제한하고 재벌을 해체하겠다고 한다. 외국인 투자도 자주경제에 방해되지 않도록 통제하겠다고 한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약속이 넘친다.

폐쇄경제로 역행한다면 더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덜 가진 자에게 고루 나눠 주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수출에 목을 거는 나라다. 그나마 세계기업과 경쟁하는 삼성 LG 현대가 있고, 중국의 15분의 1도 안되는 외자라도 들어오니 버티는 나라다. 국경 없는 자본이동을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는 경제다.

재산권 경영권 소유권의 숨통을 조이는데 이 땅에 남아 있거나 들어올 자본이 얼마나 될까. 국부창출 견인그룹의 재산권을 흔들고 터무니없는 세금으로 부를 강제 이동시켜도 국부의 유지 확대가 가능하다고 보는가. 이건 일찍이 세계적으로 끝난 ‘실패한 실험’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기업은 이미 국내보다 외국에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있다.

▼20세기형 체제 內戰 끝내야 한다 ▼

1만달러를 가능케 한 삼각체제를 버리면 2만달러시대가 올까, 5000달러시대가 올까. 어찌 꼭 경제 망친 나라들의 유산인 사회주의 모델, 포퓰리즘 모델, 열등평준화 모델, 운동권 모델에 신들린 듯한가. 이는 진보 아닌 퇴보다. 나라 안에선 수의 힘으로 세상을 뒤엎을지 몰라도 대외경쟁에선 필패만이 기다릴 것이다.

희망 있는 나라들이 진작 폐기처분한 이념에 뒤늦게 불 지펴 감성적 자주, 한풀이식 평등만 외친다면 만인이 만인의 희망을 꺾는 나라로 추락할 것이다. 1만달러짜리 위장(胃腸)을 가져 버린 국민이 견뎌낼 것 같은가. 20세기형 체제 내전, 더 늦기 전에 끝내야 한다.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