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기억상실증 환자의 로맨스를 담은 코미디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 하루가 지나면 전날의 모든 일을 깡그리 잊어먹는 루시를 위해 헨리는 그간의 일을 요약한 비디오 테이프를 매일 아침 보여주며 ‘브리핑’을 한다. 그들의 로맨스는 어떤 결실을 맺을까. 사진제공 마노커뮤니케이션
《‘매일’이란 단어는 고통스럽고도 아름다웠다.
단기기억상실증 환자의 로맨스를 담은 코미디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50 First Dates)’는 시각이 새롭다. 매일 전날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주인공이 겪는 정체성 혼란의 고민을 훌쩍 뛰어넘어, 그를 둘러싼 연인 가족 이웃의 따뜻한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
이 영화는 관객과 두뇌게임을 벌이거나 엽기적 상황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첫 키스만…’이 웃음보와 눈물샘을 ‘55대 45’의 최적 비율로 자극하는 이유는 단기기억상실증을 질병의 시각에서 정직하게 응시한 영화적 태도 덕분이다. 이 영화는 쿨하게 웃기고 나서 쿨하게 울리며, 많은 경우 쿨하게 웃기면서 동시에 울린다.》
수족관 동물을 돌보는 바람둥이 수의사 헨리(아담 샌들러)는 식당에서 루시(드류 배리모어)와 마주친다. 첫눈에 반한 헨리는 루시로부터 첫 데이트 약속을 받아낸다. 하지만 다음날 헨리를 만난 루시는 그를 치한(癡漢) 취급한다. 루시는 1년 전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에 하루만 지나면 전날의 기억이 지워지는 단기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헨리는 포기하지 않고 매일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동원해 루시에게 늘 ‘처음인 것처럼’ 접근해 사랑의 포로로 만든다.
‘총알 탄 사나이3’ ‘성질 죽이기’의 피터 시걸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웃기는 상황’이 아니라 ‘상황이 웃기는’ 쪽을 택한다. 가족은 매일 똑같은 날짜와 요일로 인식하는 루시를 위해 수도 없이 영화 ‘식스 센스’의 막판 반전을 보면서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어야 한다. 또 헨리의 경우 오늘은 길을 가로막고 도로공사를 벌이고, 내일은 자동차 고장을 내고, 또 다음날은 납치된 것처럼 가장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프러포즈를 계속한다.
‘첫 키스…’에서 단기기억상실증이란 설정은 이렇듯 재미와 감동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 단 하루도 나태함을 용납하지 않고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데이트를 통해 이 영화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파고든다. 바람둥이 헨리에게 루시는 ‘휙 떠나버려도 기억하지 못하는’ 최적의 데이트 상대였으나 나중에는 그가 날마다 지치지 않는 사랑을 바치는 사랑의 블랙홀로 변한다.
헨리의 희생을 보다 못한 루시는 헨리를 떠나보내려 한다. 그래서 헨리에 대한 짜릿한 기억(예를 들어 ‘목에 키스하면 신음한다’와 같은)을 적어놓은 일기장을 찢어 버린다. 결국 이 영화의 아름다움은 단기기억상실증 환자가 벌이는 ‘기억조작’에 있다.
헨리 역을 맡은 아담 샌들러는 벤 스틸러와 함께 최근 할리우드 코미디를 이끌어가는 쌍두마차로 손꼽힌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 그는 벤 스틸러와 아주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는 스크린 밖으로 폭발하듯 뛰쳐나오기보다 주변 인물과 하와이의 사랑스런 풍경으로 녹아들어가는 지혜로운 연기를 택했다. 그는 하루만 지나면 진짜로 까맣게 잊어버릴 것만 같은 표정을 가진 드류 배리모어와 ‘웨딩 싱어’ 이후 6년 만에 재회했다.
지저분한 헨리의 동료 울라(롭 슈나이더), 근육남 대회에서 자신이 낙방한 사실을 모르는 루시를 위해 스테로이드를 먹고 매일 근육을 뽐내야 하는 오빠 더그(숀 어스틴· ‘반지의 제왕’의 샘 역)는 화장실 유머로 웃음을 촉발하지만 동료애와 가족애의 온실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15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 가.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단기기억상실증은…▼
뇌에 손상을 입거나 심리적 쇼크 때문에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거나 끄집어내는데 어려움을 겪는 질병. 발병 이전은 기억하지만 발병 이후 일은 짧게는 몇 초 뒤, 길게는 수십 시간 뒤면 다 잊어버린다. 다음은 단기기억상실증을 소재로 한 영화들.
◇메멘토(2000년)
전직 보험수사관 레너드는 아내의 살해범을 찾아 나선다. 단기기억상실증 환자인 그는 묵고 있는 호텔, 갔던 장소, 만난 사람 등을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남기고 메모한다. 때론 몸에 문신을 새겨 정보를 남긴다.
◇노보(2002년)
사고로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그래함은 아내와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고 복사실 점원으로 산다. 그의 직장 상사 사빈느는 몇 분 전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래함을 욕정의 대상으로 이용한다.그래함은 일상을 메모한 작은 수첩을 손목에 매달고 다닌다.
◇니모를 찾아서(2003년)
치과의사에게 납치된 니모를 찾아 나선 아빠 물고기와 동료 도리의 이야기. 도리는 ‘니모’란 이름은 물론이고 치과의사의 주소도 외웠다가 바로 잊어버리는데 단기기억상실증이라기보다는 건망증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