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감독이나 제작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처음으로 결정합니다.
강우석 감독은 실미도의 과거 참혹사를 함께 아파하고 싶어서 그 얘기를 관객들 앞에 끄집어내었고, 50년도 더 지난 민족의 비극을 더욱 선명한 현재형으로 만들어놓은 ‘태극기 휘날리며’도 우선은 강제규 감독의 생각에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영화사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는 몇 해 전 우리에게도 우리의 기술로 만든 ‘잠수함 영화’가 하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유령’이라는 영화를 기획했고, ‘씨네 2000’의 이춘연 대표 역시 영화 ‘여괴괴담’ 시리즈를 기획해 한 여름이면 관객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감독이나 제작자의 손에 의해 뽑혀진 이야기는 시나리오화 되고, 신중한 회의를 거친 끝에 비로소 배우에게 건네집니다.
배우들은 여러 시나리오 중 가장 좋은 작품을 선택하기 위해 고민합니다. 좋은 작품이 많을 때는 행복한 고민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참으로 난감해집니다. 영화를 안 할 수도 없고 말이죠….
배우가 출연을 결심하면 촬영에 들어가게 됩니다. 본인이 결정한 시나리오에 의해 지옥의 섬 실미도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가거나, 심해의 잠수함으로 불려가기도 합니다. 여름엔 가끔 귀신이 되어 관객들로부터 사랑을 받지요.
저 또한 얼마 전 관객님들의 사랑 속에, '황산벌'의 계백장군이 되어 타임머신을 타고 삼국시대로 여행을 ‘심하게’ 다녀온 적이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판단을 잘못해 함량미달의 영화에 출연하게 되면 관객들은 차갑게 돌아서고 배우는 깊은 슬럼프에 빠집니다. 그래서 배우들은 작품을 선택할 때 무척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택의 대가는 자신이 치르기 때문입니다. 과연 좋은 시나리오인가, 감독과 제작사는 믿을 만한가, 상대 배우는 호흡이 잘 맞는 배우인가 등 영화 자체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간혹 절친한 학교 동문, 친척, 지인 등을 내세워 섭외해 오기도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영화를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차가운 놈이라며 소중한 인간관계를 ‘다칠’ 때도 있어 몹시 괴롭지만, 좋은 연기란 좋은 영화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냉정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일이면 우리는 향후 4년을 함께 살아야 할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선택해야 합니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우리가 뽑은 많은 이들이 우리에게 깊은 상심을 안겨 줬지만, 그간 우리의 ‘잘못된 선택’에도 책임이 있기에 반드시 표현해야 합니다.
아무리 지치고 신물이 넘어와도 정치를 우리 생활에서 뗄 수는 없잖습니까.
합당한 이유가 선택의 기준이 안 되고, 또다시 학연 혈연 그리고 지역주의만을 내세워 결정한다면 과거의 답습이 될 것은 뻔합니다. 냉철하지 못한 선택의 대가는 결국 우리가 치르게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