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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철칼럼]‘친북 검증’ 왜 덮었는가

입력 | 2004-04-14 18:43:00


오늘 17대 총선 투표가 끝나면 새로운 정치구도가 드러날 것이다. 거여(巨與)가 될지, 여소야대가 될지, 여야가 절묘한 균형을 이룰지에 따라 국정 진로가 좌우될 것이다. 그런데 어느 선거보다 바람이 자주 불어 선거 판세도 역전과 반전을 거듭했지만, 국정의 물줄기를 가늠할 수 있는 내용에서는 딱히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되레 어수선한 분위기다. 마치 질펀했던 물이 모래땅 속으로 스며든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앞으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국정 방향이다. 이는 선거 전과 총선 과정에서 불거진 이해충돌과 국론분열이 어떻게 정리되느냐의 문제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민의를 사법처리할 수 있는가’라는 주장을 수용할 것인가. ‘민중의 함성 이상의 헌법은 없다’는 선언은 유효한가. 공무원의 정치행위 금지를 명시한 실정법과 국민기본권 보장 요구는 양립할 수 있는가. 보안법은 폐기될 것인가. 한미동맹과 민족공조에서 무엇이 우선하는가. 그리고 이제 시민혁명은 끝났는가.

▼총선 위기감의 이유는 ▼

모래땅과 물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정치권이 이번 선거에서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핵심 쟁점을 슬그머니 넘겨 버렸기 때문이다. 선거 전만 해도 국론분열의 진원지로 제일 먼저 꼽혔던 것이 사회 곳곳에 번지고 있는 ‘반미친북’ 좌경화 현상 아닌가. 김수환 추기경이 공개적으로 언급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전부터 좌경화 분위기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줄곧 있어 왔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하게도 총선기간 중 다수 원내의석을 갖고 있는 어느 정파도 좌경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 제기됐고,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나섰을 뿐이다. 어느 정당에선 보수세력을 자극하는 문제를 피하면서 선거를 휘감을 수 있는 대통령 탄핵에 전력투구하는 전략을 펴고 싶었을 것이다. 또 ‘색깔론’의 구태 정치공세란 비판을 받기 싫은 데다 ‘차떼기’ 오명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급하다고 생각했을 정당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국론 정리가 더 어렵게 됐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대목이 있다. 적지 않은 사람이 총선에 위기감을 느껴 왔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까놓고 말해서, 새로운 정치구도에 따른 ‘친북’ 의구심 아닌가. 지금 사회에 미만한 좌경화 분위기는 한 여론조사에서 안보에 위협적인 국가로 미국을 북한보다 더 많이 꼽을 정도에 이르렀다. 이런 판에 지하철을 타면 ‘여러분의 신고가 국가안보를 지킨다’는 간첩신고 안내방송을 듣게 된다. 객차 안에는 신고 상금 내용도 붙어 있고, 좌익사범은 3000만원이다. 공안 당국은 그동안의 이념적 혼재 상황을 어떻게 보아 왔는지, 어디까지가 좌익사범인지 궁금하고, 헷갈릴 뿐이다. 신고 상금 예산이 얼마나 집행됐는지도 들어 본 적 없다. 밖으로는 유엔 대북인권결의안에 대한 정부의 뒷걸음질로 나타났다. 이러고도 ‘친북’ 의구심을 지울 수 있겠는가.

▼모래 속 스며든 ‘좌경화’ ▼

진보세력을 자임하는 좌파는 시대의 흐름으로, 또는 진보와 보수의 공존이 다양하고 건강한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조건이라고 말하지만, 좌경화를 경계하는 사람들은 이를 ‘친북’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러니 더욱 이번 선거에서 정색을 하고 다뤘어야 했다. 더욱이 한국사회가 지향해 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을 포기해야 하는지, 수정해야 하는지에 이르면 불안감은 한층 커지게 마련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선거에 나선 주요 정파의 이념적 정체성이야말로 최대 관심사 아닌가. 이에 대한 유권자의 의사를 묻는 것이 선거 아닌가. 나라의 진로가 걸린 이 문제보다 심각한 현안은 없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이념 검증이 왜 매도돼야 하는가. 선거가 검증절차라면, ‘친북 검증’을 피해 가는 이유를 모르겠다. 유권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핵심을 색깔론이라고 덮어 버린다면, 눈과 귀와 입을 막겠다는 것이다. 덮는다고 없어질 일도 아니잖은가.

이번 선거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정작 중요한 것을 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좌경화 물길도 잠시 모래땅 속으로 스며들었을 뿐이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