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은 어떻든 국민들보다 똑똑하지. 그들이 잘나서 의원이 되었다면 물론 그런 것이고, 그들이 못났다면 그걸 모르고 선출한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이거든”이라고 젊은 철학도 버트런드 러셀이 친구에게 말했다. 오래 전 러셀의 자서전에서 본 이 구절이 지금껏 기억되고 있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러셀의 말이 맞지만 실제에서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경우를 숱한 선거와 그 결과에서 확인했던 탓일 게다. 러셀의 말투는 비아냥대는 투였고 나도 그 비아냥거림에 공감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번 총선에서는 정색하고 우리보다 잘난 ‘선량’이 뽑히기를 각별하게 기대해 본다. ‘각별하게’라고 써야 할 이유가 있다.
▼선거문화 희망적인 변화 조짐 ▼
우선 이번 총선에서는 선거자금과 운동이 엄격하게 통제돼 이른바 ‘선거문화’의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법만이 아니라 관계기관의 태도도 달라졌고, 후보들도 그래서 극히 몸조심하고 있으며, 그래야 할 만큼 시민들의 의식도 좋아진 모습들이 보인다. 선거 비용이 적게 드는 것은 민의의 바른 표출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에 합당한 것이고, 선거운동이 투명해지는 것은 그 원칙이 제대로 실천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선거 때마다 선보이던 부정과 혼탁의 관행들이 이번에는 사라질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입후보자와 유권자가 새로운 선거체제에 잘 적응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 제도가 그만큼 착실하게 자리 잡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처음으로 후보 개인과 정당에 각각 투표하는 1인2표제가 실시된다는 점도 내게는 중요한 관심사다. 아마도 내각책임제에서 주로 채용되고 있을 이 투표 방식은 무엇보다 사표(死票)로 사라질 소수 의견들을 의회에 반영시킬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다. 이 때문에 지역구 국회의원을 배출하지 못해 의회에 진출할 수 없던 군소 정당들도 국회에 비례대표를 투입할 수 있을 것이어서 다양한 소수 의견들이 국정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후보 개인과 정당의 선호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어서 많은 사람들이 곤혹스러워지긴 하겠지만 정당에도 투표할 수 있게 된 것은 앞으로 정당들로 하여금 정강정책을 중시할 계기를 만들어 줄 것이다.
후보자들이 밀실에서가 아니라 심사위원회를 거쳐 공개적으로 공천을 받게 된 점도 매우 희망적인 변화다. 과거의 공천 시스템에서는 여당은 집권자에 대한 충성심을 담보로, 야당은 정치자금의 갹출 규모로 공천자를 지도부의 일방적인 뜻에 따라 결정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희망자의 인품과 능력, 지역구의 여론 등을 놓고 당 내외의 인사들이 객관적으로 판단해 후보자를 선정했다. 이 시스템 변화는 기존의 정치적 폐습을 극복하는 중요한 단서로 기능할 것이다. 여성 후보자 수의 약진과 장애인의 공천도 이 시스템 덕분이다.
▼정치적 보혁구도의 첫걸음 ▼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번에는 여야가 진보와 보수의 경쟁으로 대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당 때의 부정선거, 유신과 신군부 시절의 민주-반민주, 3김 시대의 지역감정으로 쟁점 대결해 오던 우리 총선의 역사에서 아마도 처음이라 할 이 이념적 대결은 대통령 탄핵사태로 분위기가 어지럽고, 보수-진보의 정책적 구분이 분명치 않으며, 지역감정이 되살아나고 무엇보다 신구(新舊) 세대간의 감정적 대립으로 그칠 취약성을 보이고는 있다. 그럼에도 앞으로 같은 세대간의 정치적 보-혁 구도를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은 분명하다.
오늘 나는 투표장으로 가면서 내 기대가 얼마나 채워질지 궁금해진다. 총선의 결과가 나올 내일, 우리의 기대와 실제가 어느 만큼 합치할 수 있을지, 정말 우리보다 똑똑한 국회의원들이 선출돼 앞으로의 한국 정치문화의 발전이 희망적일지 밝히 보고 싶다.
김병익 문학평론가·인하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