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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일 폰테’ 홍석일 지배인의 ‘나의 일 나의 철학’

입력 | 2004-04-15 15:52:00

일 폰테의 손님은 40% 정도가 외국인. 이 때문에 홍석일 지배인은 “늘 민간 외교관이라는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일한다”고 말한다.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밀레니엄서울 힐튼호텔의 일 폰테는 국내 최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꼽힌다. 지배인인 홍석일 차장(45)은 1987년 1월 문을 열 때부터 17년 동안 줄곧 이곳을 지켜왔다. 이 정도면 한국 이탈리아 식당사(史)의 산증인이라고 할 만하다. 호텔 직원들이 보통 2, 3년에 한 번씩 식당을 순환 근무하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드문 경우다. 4월 어느 저녁, 그의 눈으로 특급 호텔의 레스토랑을 관찰했다.》

○ 예약석도 손님취향 맞게

문을 열려면 한 시간이나 남았지만 식당의 직원들은 모든 준비를 이미 끝낸 모습이다. 다들 밝은 표정. 홍 차장은 “호텔 직원들은 개인적으로 슬프거나 힘든 일이 있어도 늘 웃어야 한다”며 “그게 건강 비결”이라고 밝게 웃는다.

예약 상황판을 잠깐 들여다봤더니 절반 이상 찼다. 예약 손님들은 테이블 배치까지 모두 끝난 상태. 식당은 텅 비어 있지만 테이블에는 벌써 주인이 있는 셈이다. 아무렇게나 배치한 건 아니고 철저하게 손님의 취향에 맞췄다. 몇 번 온 손님들은 좋아하는 자리를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홀 한가운데보다는 창가나 구석이 좋은 자리지만 늘 그런 건 아니다. 얼굴이 잘 알려진 명사들 가운데 의외로 가운데 테이블을 찾는 경우도 있다.”

○ “외국인이 40%”

드디어 첫 손님. 혼자 온 외국인이다. 이 식당 손님의 약 40%가 외국인이라고 한다. 단순 여행객보다 비즈니스맨이 많다. 그래서 직원들은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식당에서 모든 비즈니스가 연결된다. 웨이터가 역할을 완벽하게 하면 역사가 바뀔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설명. 외국계 은행에서 지사장이 바뀔 때 인수인계 리스트에 일 폰테가 끼어 있는 곳이 많다.

6시50분. “알아서 달라”고 일부러 어려운 주문을 해봤다. 두 시간 째 앉아 있는 모습이 다소 지쳐보였는지 정력에 좋다는 양고기 스테이크를 권한다.

“손님의 얼굴만 척 보면 필요한 메뉴를 알 수 있다. 의사는 환자에게 처방을 내리지만 웨이터도 손님이 건강을 유지하고 회복하게 도와야 한다.”

○ 고객 대소사도 챙겨

“김 사장님이 내려오십니다”라고 프런트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 오늘의 최고 VIP. 홍 차장은 식당 밖으로 뛰어나가 잠시 대기했다가 일행을 맞아 예약된 자리로 안내했다.

그의 수첩에는 600명가량 핵심고객에 대한 데이터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얼굴을 아는 고객까지 따지면 3000명 가까이 된다고 했다. 정치인, 기업인, 연예인에서 ‘어깨’들까지 그에겐 형님도 많고 동생도 많다. 서울 시내에서 출퇴근할 때 승용차 뒷좌석에 앉은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안면이 있다.

그냥 얼굴만 아는 정도가 아니다. 새해 인사도 하고 각종 대소사도 챙긴다. 진짜 형님 동생 같다. 얼마 전 그가 상을 당했을 때는 모 기업의 회장과 회장 부인이 각자 조문을 와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런 관계는 호텔에서도 무엇과도 바꾸기 어려운 자산이다. 그의 장수 비결일지 모른다. 호텔의 고가 판촉 행사에 그가 참여하지 않으면 빈자리가 생긴다. 명절마다 호텔에서 마련한 선물세트를 수천만원어치씩 팔아치우는 것도 그다.

○ 2차 술자리도 OK

문을 연 지 4시간이 지났다. 그는 손님을 맞으랴, 테이블을 돌며 대화하랴 무척이나 바쁘다. 그는 직원들에게 발바닥을 30초 이상 붙이지 말라고 주문한다.

“요리 기술은 계속 비슷해진다. 손님들은 가슴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식당을 찾게 될 것이다. 손님들과 대화하려고 노력하라. 손님은 왕이 아니라 ‘가족’이다.”

물론 ‘가족’과의 관계가 늘 좋은 것은 아니다. 홍 차장은 “실제로 주문이 들어간 시간을 확인해 보면 겨우 2, 3분 지났는데 ‘20분이 넘도록 왜 안 나오냐’며 짜증을 내는 손님도 있다”고 말했다. 한 번은 모 정치인이 와서 원래 딱딱한 하드볼을 먹으며 ‘빵이 왜 이렇게 딱딱하냐’고 탓해 난감했다고 한다.

그래도 손님이 언제나 옳다.

오후 10시반. 그는 식사를 마친 단골 고객의 2차 자리에 불려간다며 나갔다.

애프터서비스라고 할까, 2차 자리에서 분위기를 띄워주는 도우미 요청이 오면 마다하지 않는다. 철인 같다.

실제로 그가 보이지 않으면 찾는 손님들이 많아 앓을 수도 없다고 했다. 웃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나이 마흔을 넘기면서 매년 한 두 번은 꼭 보약을 지어 먹고 있다.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