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가 경비행기를 타고 찍은 종로(왼쪽). ‘서울 20세기’ 자료집에 실려 있는 1976년 세종로네거리에서 바라본 종로(가운데). 2004년 신문로에서 본 종로(오른쪽). 아래 사진은1920년대 종로거리. 서민의 일상이 사라진 자리에 높이 솟은 빌딩들은 선인가, 악인가.이종승 기자urisesang@donga.com
《올해 2월 한양대 도시공학과의 이보경 연구원(31·여)은 ‘서울 도심의 경관변화 프로젝트’를 위해 서울 종로구 청진동 일대를 답사했다. 100여 개의 조그만 식당들이 몰려 있던 2400여평의 공간에는 철거 흔적만 남아 있었다. 그가 사진기를 꺼내 몇 장 찍자마자 손에 무전기를 든 건장한 청년 2명이 손을 내저으며 다가왔다. 이씨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곳은 도심재개발이 시작된 ‘청진동 6지구’였다. 》
점심시간이면 수천 명의 회사원들이 다닥다닥 붙은 키 작은 식당들로 몰려들면서 골목길을 가득 채우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철제 담으로 둘러싸여 연면적 약 3만평의 지상 20층, 지하 7층짜리 주상복합 빌딩이 올라갈 채비를 하고 있다.
600년 역사를 ‘복원’한다고 바쁜 청계천의 100m 북쪽에서는 역시 600년의 흔적을 지닌 종로의 관문이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서둘러 ‘퇴장’하고 있었다.
역사가 준 자원은 아랑곳없이 백지에 그림 그리듯 일을 벌리는 ‘도시 근대화’ 과정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 종로는 길이다
한양대 건축학과 서현 교수의 연구실에는 조선 정조 때 제작된 서울지도인 ‘한성전도’ 복사본이 걸려 있다. 한성전도에는 사대문 안의 길들이 빨간색으로 표시됐다. 서 교수가 그 길들을 서울의 ‘5000분의 1 교통지도’와 비교했더니 청진 6지구의 길 가운데 한성전도의 길과 포개지는 길이 세군데 있었다. 지금 그 길들은 흔적조차 없어지고 있다.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강홍빈 교수는 “길은 그저 왔다갔다 하는 통로만이 아니다. 길은 머무는 장소다. 그러나 현대로 올수록 길이 머무는 곳이었다는 것을 잊고 있다”고 말한다. 좋은 길은 왕래가 잘 될뿐더러 머물 데가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종로가 그렇다. 조선왕조가 열리고 시전과 육의전 등 상가가 들어선 이래 사람들은 그 길을 가다 물건을 사고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빈대떡이 생각나면 ‘열차집’을 찾았고 골목을 지나다 생선 굽는 냄새에 동해 불쑥 들어가 “고등어구이 2인분”을 주문했다. 길을 가다 어느 곳이든 쉽게 들어갈 수 있다. 길옆이 뚫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재개발된 도심의 길은 그렇지 않다. 사람이든 자동차든 잘 통하기만 하면 최고다. 청진동의 맞은편 서린동 재개발지역을 보자. 길과 건물은 별개다. 건물은 길에서 섬처럼 떨어져 있다. 거리는 깨끗하고 쉴 곳도 있지만 다니는 사람은 청진동쪽보다 눈에 띄게 적다.
길은 도시를 풍부하게 한다. 그러려면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하고, 재미있어야 하며, 걸어다니는 사람을 편하게 해줘야 한다. 종로는, 특히 청진동 골목은 사람을 막지 않는다. 큰 길가의 패스트푸드점과 뒷골목의 허름한 음식점이 행복하게 공존한다. 남녀노소 누구든, 주머니에 돈이 많든 적든 그들이 머물 거점이 종로에는 있었다. 길이 있었다.
○ 종로는 장소다
1920년대 일제는 서울에 관공서, 학교, 병원 등 근대적인 기관들을 짓기 시작했다. ‘관청형 건물(institute)’이라고 부른다. 이전에는 땅이 있으면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 회랑이 늘어섰으며 회랑 곳곳이 트여서 안쪽을 들락날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관청형 건물은 땅에 건물을 하나 올리고 나머지는 빈터로 놔둔다.
이 방식은 서울 도시재개발에 그대로 이어졌다. 기존의 길과 건물을 모두 밀어버리고 땅을 네모로 만든 뒤 건물을 어떻게 앉히느냐만 신경 썼다. 을지로와 서린동이 그랬다.
최근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패밀리 레스토랑이 문을 닫았다. 1990년대 초 ‘치킨 도리아’라는 음식으로 수많은 청소년과 대학생을 끌어들였던 곳이다. 압구정동에서 20여년을 산 30대 여성은 “추억이 많았는데”하며 애석해 했다.
장사가 안돼 20년을 못 채우고 문을 닫는 음식점에도 사람들은 추억을 담는다. 그들에게 그곳은 압구정동 몇 번지라는 공간이 아니라 ‘치킨 도리아’를 먹었던 장소로 남는다.
장소는 실체다. 개성을 가진 체험적 실체다. 그것은 역사, 추억, 냄새, 사람, 마음의 풍경을 갖는다. 빈대떡 하면 ‘열차집’을, 해장국 하면 ‘청진옥’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까지 해온 블록식 재개발은 도시를 면적으로만, 공간으로만 보고 있다. 기능적 측면만 강조하는 도식화된 사고방식이다. 그것이 고스란히 종로에 대입되고 있다. 600년 역사의 그때, 그 특수한 시점의 장소가 묻히고 있다. 서민의 역사가 사라지고 있다.
○ 종로답다는 것
전문가들은 ‘종로타워’같은 블록식 재개발은 그만해야 한다고 말한다. 종로라는 길은 이가 빠진 듯 듬성듬성하면 안 되고 연속적 공간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종로 뒷골목의 특성을 살리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서울시립대 도시과학대학 조경진 교수는 “큰길가는 5∼6층으로 주위와 비슷한 형태와 외관을 지닌 건물을 짓고 뒷골목은 되도록 보존해야 한다. 건물 뒷면에는 낮은 층의 건물로 리모델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의 많은 골목길이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골목의 폭과 건물의 높이가 ‘1대2’나 ‘1대3’ 정도를 유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양대 서현 교수는 “서울 성곽처럼 오래된 길은 사적으로 지정해야 한다. 그리고 필지를 부득이 하게 통합할 때도 일정한 면적을 넘지 못하게 해야 건물의 높이와 크기를 알맞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 교수 역시 조 교수와 마찬가지로 건물 외벽선과 대지경계선을 붙여서 회랑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1층은 소매점 위주로 해야 된다고 덧붙였다. 사람이 몰려야 도심이 건강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종로가 보여줘야 할 것은 사람들이 섞여 살면서 만들어내는 갈등과 화합의 에너지라고 말했다.
종로네거리의 종로타워도 원래 도시의 질서에 전혀 이질적인 것이 들어와 극단적인 드라마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블록식 대형 건물이 연속으로 늘어선다면 종로는 자신만의 다양성을 잃어버릴 것이다.
○ 종로의 미래
2001년 서울시는 철거재개발과 ‘수복(修復)재개발’을 같이 적용하겠다는 ‘서울 도심재개발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즉 전통적인 가로와 필지의 패턴을 간직한 지역은 소규모로 중저층 건물을 짓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서울시는 청진 6지구 사업을 승인했다. 수백 년 역사가 담긴 길이 있었지만 무시됐다. 중저층이 아닌 고도제한(90m)에 딱 맞춘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선다. 남은 청진동의 16개 재개발 지구와 그 옆의 공평지역, 세운상가 지역 재개발의 단초를 보여준다.
익명을 요구한 도시학자는 청진동 재개발을 제조업 불황으로 갈 곳을 찾던 대자본이 개발차익이 큰 낙후한 도심 재개발 지역에 침투한 것으로 해석했다. 앞으로 이런 식의 개발이 계속된다는 것. 그러면 비공식적 영역에서 경제활동을 해온 비숙련 노동자, 노점상, 영세 자영업자 등의 네트워크가 붕괴된다. 소비층이 한정되면서 40대 이상에게서 종로가 멀어진다. 그는 도시계획이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정치가 통합된 문제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보는 종로의 미래는 비관적이다. 그러나 한양대 도시공학과 최종현 교수는 “도시의 인간화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도시인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경제학적인 분석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얼마나 이해하고 애정을 갖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