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일본제철은 최근 자동차 조선 전자업계에 공급하는 강판(鋼板) 가격을 4월 출하분부터 올려 받겠다고 선언했다. 중국의 ‘원자재 싹쓸이’가 심화되면서 철강제품의 원료인 철광석 국제 시세가 20%가량 올랐기 때문이다.
장기 불황을 거치면서 제품 값이 떨어지는 데만 익숙한 일본에서 판매업자가 ‘당당하게’ 가격 인상을 통보하는 것은 매우 낯선 풍경이다. 그런데도 자동차업계는 10% 안팎의 인상률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경기회복에 따른 매출 증가로 자신감을 되찾은 조선, 전자업계도 “수익압박 요인은 되겠지만 공장을 가동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않으냐”는 반응이다.
일본 정부는 한술 더 떠 신일본제철의 결정을 은근히 환영하는 분위기다. 강판 가격 인상이 물가상승으로 이어져 10년 넘게 일본 경제를 짓누른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후쿠이 도시히코(福井俊彦) 일본은행 총재는 “중간재 부문의 단가 상승이 최종소비재까지 파급되는 속도가 과거의 예에 비해 너무 느리다”면서 “물가 오름세가 확실해질 때까지 시중에 돈을 푸는 정책 기조를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3월의 기업물가지수는 95.5(2000년 평균=100)로 3년8개월 만에 처음으로 전년 동월 대비 플러스로 돌아섰다. 제조업체들은 원자재 값 상승분을 소비자가격에 반영할지 아니면 손해를 감수하고 당분간 기존 가격을 유지할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아직까지는 매출 감소를 염려해 후자를 택하는 쪽이 대세다. 미쓰비시전기의 한 임원은 “메이커간 경쟁이 워낙 치열해 개인 소비가 본격적으로 살아나지 않는 한 판매가격을 올리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26인치 이상 디지털TV의 평균가격은 지난해 4월 49만7000엔(약 490만원)에서 올해 2월엔 38만엔대로 떨어졌다. 휴대전화와 디지털카메라의 전원에 쓰이는 리튬전지 값이 8% 올랐지만 업체들은 오히려 판매가를 낮추고 있다.
지갑 사정이 좋아졌어도 소비자들은 싼 값에 쇼핑하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인플레이션도 무섭지만 디플레이션의 폐해도 그에 못지않다는 점을 일본이 보여주고 있다.
박원재 특파원 parkw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