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몰린다. 하지만 배우가 없다.
요즘 충무로의 분위기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3년 영화산업 매출은 3조7780억원. 1997년 1조2572억원에 비해 3배 이상 급성장했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로 이어지는 ‘1000만 관객 바람’은 자본의 유입을 가속화하고 있지만 정작 ‘A급 배우’를 캐스팅하기란 쉽지 않다. 자연스럽게 배우 개런티는 치솟고 제작사는 “남는 게 없다”며 볼멘 소리를 한다. 스타들의 개런티 상승 추세와 그 이면을 짚어본다.
○영화산업 매출 3조7780억원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은 현재 최고의 개런티를 보장받는 여배우로 꼽힌다. 6월 개봉 예정인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에서 그가 받는 개런티는 3억∼4억원. 소속 매니지먼트사인 ‘싸이더스 HQ’의 자회사 ‘아이 필름’이 제작하지 않았다면 개런티는 훨씬 더 올라갔으리라는 게 영화계의 후문이다.
‘싸이더스 HQ’의 정훈탁 대표는 “10억원을 주겠다는 신생 제작사도 있었지만 전지현이 돈만으로 작품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작사의 신뢰도나 감독의 연출능력 등이 배우의 출연 여부를 결정하는 이유이고, 영화 규모를 감안해 소속 배우의 개런티는 4억원을 넘지 않도록 정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인어공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투자, 제작사인 ‘유니코리아’ 최성민 대표는 “돈이 늘었지만 과거처럼 ‘묻지마’ 투자 형태로 뛰어드는 ‘눈 먼 돈’은 사라졌다”며 “시나리오와 감독이 좋아도 ‘스타 파워’가 없으면 투자자를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제작 능력이 입증되지 않은 신생 제작사가 거액을 제시하며 배우에게 매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男 송강호 女 전지현 특급대우
현재 가장 많은 개런티를 받는 배우는 송강호. 그는 곧 촬영에 들어갈 ‘남극일기’로 고정 개런티 5억원과 흥행성적에 따라 수익을 배분받는 러닝 개런티인 ‘플러스 α’를 보장받았다. ‘꽃피는 봄이 오면’의 최민식과 ‘역도산’의 설경구도 각각 ‘4억8000만원+α’와 4억원을 기록했다.
한때 ‘흥행 보증수표’로 불리며 지난해 최초로 5억원의 개런티를 받았던 한석규도 신작 ‘주홍글씨’를 통해 고정 개런티 3억원 등 총 5억원이 넘는 대우를 받았다.
티켓 파워와 연기력을 두루 갖춘 이들 ‘특 A급’을 중심으로 박중훈 장동건 권상우 배용준 이정재 등이 3억5000만∼4억원대의 A급 배우군을 형성하고 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와 드라마 ‘천국의 계단’의 성공으로 캐스팅 표적이 됐던 권상우는 ‘신부수업’에서 ‘4억원+α’로 ‘가볍게’ 4억원대를 넘어섰다. ‘말죽거리…’의 출연료가 2억7000만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폭발적 상승세다.
‘태극기…’ 바람을 등에 업은 장동건 원빈,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로 영화계에 데뷔한 배용준도 전작 흥행성공과 동남아와 일본에서 상품성이 높다는 이유로 장래 특 A급의 개런티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과거와 달라진 것은 이름 석자만으로 투자를 받을 수 있는 남자 배우층이 두터워졌고, 그들의 몸값도 1억 원 이상씩 상승했다는 점이다.
여배우로는 전도연 전지현 장진영이 3억원대의 개런티로 선두군을 형성하고 있다.
전도연은 ‘인어공주’에서 ‘3억3000만원+α’, 장진영은 ‘청연’으로 3억원을 기록했다. ‘공동경비구역 JSA’ ‘선물’ ‘봄날은 간다’의 이영애도 드라마 ‘대장금’의 여세를 몰아 영화에 출연하면 A급 대우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밖에 하지원 손예진 김하늘 김정은 이미연 이미숙 이은주 염정아 문근영이 뒤를 잇고 있다.
○러닝 개런티 몸값상승 부채질
배우들의 개런티 상승에는 러닝 개런티가 한몫한다. 러닝 개런티는 97년 한석규가 ‘쉬리’에 출연하면서 도입된 뒤 이제는 주연은 물론 조연 배우에까지 일반화됐다.
하지만 ‘LJ필름’ 이승재 대표는 “초기 투자 위험을 나누는 대신 흥행에 성공하면 그 열매를 나누자는 게 러닝 개런티의 취지인데 악용되고 있다”면서 “현재의 상황은 배우들이 고액의 개런티는 그대로 챙기고 러닝 개런티는 ‘덤’으로 받는 기형적 형태”라고 말했다.
이문식 성지루 이원종 등 이른바 ‘주연급 조연’의 개런티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2001년 ‘달마야 놀자’에서 1000만원을 받았던 이문식은 속편 격인 ‘달마야 서울 가자’에서는 10배인 1억원을 받았다. 두 작품의 출연자 수는 비슷하지만 배우 개런티는 6억원대에서 13억원대로 껑충 뛰었다.
○강우석 감독의 가이드라인?
배우들의 개런티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개런티가 ‘짜고’ 러닝 개런티 계약을 하지 않는 ‘시네마서비스’의 계약 원칙이 앞으로 계속 지켜질지도 관심거리다. 사실상 이 회사의 배급, 제작 능력을 앞세운 ‘강우석 감독의 가이드라인’인 셈이다.
시네마서비스가 제작한 작품의 출연자 중 최고의 대우를 받은 배우는 ‘실미도’의 설경구로 3억5000만 원. 설경구와 최근 ‘귀신이 산다’의 차승원(3억 원)은 4억 원대의 출연료가 가능하지만 시네마서비스의 작품을 선택하면서 상대적 불이익을 감수한 케이스. 개런티 논쟁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보이지만 참고할 만한 실마리도 있다. 장동건은 2002년 순제작비 7억원의 저예산 영화 ‘해안선’(김기덕 감독)에 출연하면서 고정 개런티 5000만 원에 서울 관객 50만 명이 넘으면 관객 1인당 500 원씩을 받는 러닝 개런티 계약을 했다. 6월 개봉 예정인 ‘거미 숲’(송일곤 감독)의 순제작비는 14억5000만 원. 서정은 개런티 8000만 원 가운데 4000만 원만 받고 나머지는 수익이 나면 받기로 했다. ‘좋은 영화’ 김미희 대표는 “배우 개런티는 작품의 규모와 예산에 연계되는 것이 필요하다”며 “배우 개런티가 30%에 이르는 현재 제작여건에서는 제작사가 수익을 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갑식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