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연기한 영화 ‘황산벌’의 계백장군은 참으로 독특한 인물입니다. 다른 장수들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는 데 이 장수는 처자를 죽인 다음 전쟁터로 향합니다. 계백장군을 연기할 때 가장 힘든 점이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연기란 주어진 가상을 충실히 믿고 순간을 사는 것입니다. 배우는 자기 최면을 걸어 그 인물이 되어야만 하는 데 계백장군만큼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야, 전쟁의 패배를 예감한 계백이 적의 손에 가족을 죽게 하느니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조국 백제를 위해 황산벌로 달려가 장렬히 전사한 충장(忠將)이었다고 해석하면 그만이지만, 그 인물이 돼서 막상 구체적으로 연기하려는 배우 입장에선 참 황당했습니다.
계백장군을 꿈에서라도 만날 수 있었다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처자를 죽였느냐”고 한번 야무지게 따지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1남2녀와 아내를 칼로 베는 장면을 찍기 1주일 전부터 저는 새벽에 몰래 일어나 잠자는 아내와 아이들을 노려보기 시작했습니다. 저 또한 우연의 일치로 1남2녀의 아이들을 두고 있는 처지입니다.
귀엽게 새록새록 잠자는 꼬맹이 세 명과 아내를 시퍼런 장검으로 목을 쳐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막 시리도록 아파왔습니다. 난감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자니 계백장군으로 몰입하기 어려웠고, 몰입하자니 가족 생각에 너무 슬펐습니다. 그렇게 괴로운 1주일이 지나 촬영 날짜가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날은 폭우가 쏟아져 촬영이 취소돼 버리고 말았죠. 결국 그 촬영은 이미 잡혀 있는 다른 신의 촬영 스케줄 때문에 그로부터 한 달 뒤에나 가능했습니다. 가족들에게 미안해 계백 역에 얽힌 사연을 얘기도 못했던 저는 그 한 달을 1년처럼 길고 힘겹게 보냈습니다. 며칠 심한 몸살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형사 역을 위해 실제 강력반 형사를 3개월 동안 쫓아다닐 때는 세상 사람들 3분의 1이 범죄자로 보였습니다. 영화 ‘세이 예스’의 사이코 살인마를 연기할 때는 실제 제 정신도 이상하게 돼 버리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촬영이 종료되면 한동안 술에 절어 살거나 혼자 훌쩍 모든 연락을 끊은 채 여행을 떠나곤 합니다.
그런 일탈을 통해 저를 비우지 않으면 견디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결혼한 후에도 계속해서 그런 방식으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하며 풀기도 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결국 그날 처자를 죽이는 장면을 촬영한 다음 아내에게 가서 그간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흠뻑 위로받고 싶었습니다. 바쁘게 외출을 준비하던 아내는 이렇게 얘기해 줍니다.
“(눈을 한동안 멀뚱멀뚱 거린 다음 건성으로) 아! 그랬어요. 근데 나 지금 배승이 데리러 학교에 가야 되거든요. 나중에 얘기해요.”
그리고 아내는 황급히 나가버리더군요.
유부남이 예술가로 산다는 거, 이거 쉽지 않습니다. moviejh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