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경북 구미시 코오롱 공장의 원사(原絲) 생산라인.
생산된 실이 가득 쌓여 있어야 할 공장은 출입금지를 경고하는 테이프에 둘러싸인 채 적막감만 감돌고 있었다. 30년 넘은 노후 기계를 처분하기 위해 가동을 중단했다는 것이 코오롱측의 설명이다.
하지만 “생산하면 할수록 적자가 나는데 어떻게 공장을 돌립니까”라는 근로자들의 반문이 이 기계의 퇴역 이유를 간접 설명했다.1963년 국내 최초 나일론 원사 생산, 1990년대 자산 순위 16위,나일론필름 점유율 세계 4위…. 한국 경제의 성장과 함께하며 화학섬유업계의 대표주자로 군림했던 코오롱은 지난해 683억원의 적자를 냈다.
코오롱은 최근 섬유 중심에서 벗어나 전자재료업체로 변신할 것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시장은 아직 관망하고 있다.외환위기 때도 살아남은 중견그룹 코오롱에 그간 무슨 일이 있었을까.원사 생산라인이 떠난 자리는 무슨 기계가 메울까.》
기존 산업의 위축과 신산업 진출 실패, 취약한 자금력 등으로 한국 경제의 허리를 맡고 있는 중견그룹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코오롱은 최근 수익성이 떨어진 원사 생산라인 일부를 매각키로 하는 등 생존을 위한 변신을 모색하고 있다. 구미=고기정기자
▽생존의 갈림길=코오롱이 작년 적자를 낸 이유는 무엇보다 한국 화섬산업의 쇠락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임금 등 원가 부담이 커지면서 범용(汎用) 원사의 경쟁력이 떨어진 데다 중국과 인도의 부상으로 시장 지배력이 급격히 하락했다.
코오롱 구미공장의 매출액 대비 직·간접 인건비는 17∼18%. 평균 5000만원 안팎인 생산직 근로자의 임금으로는 중국 업체와의 가격 경쟁이 쉽지만은 않다.
이 같은 상황은 다른 화섬업체도 마찬가지여서 국내 13개 대형 업체 가운데 7곳이 문을 닫았다.
화섬산업의 한계가 극명해지면서 코오롱도 생존을 위한 변신을 계속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전 30여개에 이르던 계열사를 17개로 줄였다. 벤처산업에 투자하고 비(非)제조업에 진출하는 등 사업도 다각화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적자 가운데 300억원가량은 지분법에 의한 손실로 자회사들의 손실이 원인이었다. 비제조업도 아직까지는 뚜렷한 결실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한때 정수기 판매 사업을 했지만 지금은 사실상 포기했습니다. 수십년간 제조업을 하던 기업이 유통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지요.”(코오롱 중앙기술원 정봉덕 차장)
기회도 있었다. 99년 신세기통신 지분을 매각하면서 1조2000억원의 현금이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옛 코오롱상사의 부실을 정리하는 데 8000억원을 투입했고 나머지는 소규모 신사업 진출에 썼다.
결국 코오롱은 산업의 쇠퇴와 기업의 대응능력 확충이라는 갈림길에 서있는 셈이다.
▽심화되는 양극화=코오롱을 포함한 중견그룹 대부분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 때문에 삼성 LG 현대자동차 SK 등 4대 그룹과 두산 효성 동양 등 중견그룹간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추세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4월 1일 현재 자산 2조원 이상 41개 그룹 가운데 상위 4대 그룹의 총자산은 253조원. 하지만 나머지 37개 그룹의 자산은 이보다 적은 215조원이다.
지난해 매출을 보면 4대 그룹이 298조원으로 나머지 그룹(185조원)을 다 합친 것보다 100조원 이상 많다. 당기순이익에서도 4대 그룹은 17조원을 남겼지만 나머지 그룹은 5조원에 그쳤다.
수출에서도 중견그룹의 위축은 뚜렷하게 나타난다.
97년 총수출액 가운데 반도체와 자동차, 무선통신기기, 컴퓨터 등 상위 4대 품목의 비중은 26.4%였지만 지난해에는 37.3%로 급증했다. 이들 품목은 대부분 4대 그룹이 생산하는 것이다.
중견그룹들도 미래 성장산업에 과감히 진출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반도체나 자동차, 무선통신기기 사업에 진출해 4대 그룹과 경쟁하려면 적어도 수조원의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
“기업의 투자 여력은 보통 매출의 20%가 고작입니다. 매출 2조원짜리 그룹으로선 기껏해야 연간 4000억원을 마련할 수 있는데 이 돈을 한 사업에 몽땅 쏟아 붓는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코오롱 임추섭 IR팀장)
기존 산업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바꾸는 것도 여의치 않다. 상품의 생명주기가 짧아져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투입하고도 기대했던 수익을 얻기가 어려운 데다 신제품을 내놔도 다른 나라나 기업들이 금방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2000년 상위 5개사의 연구개발비 비중은 전체 기업 연구개발비의 34.8%였지만 2002년에는 37.5%로 높아졌다. 반면 상위 6∼20개사의 연구개발비 비중은 같은 기간 20.6%에서 12.1%로 줄었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