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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아크로폴리스]헌법에 의한 지배는 가능한가?

입력 | 2004-04-21 18:37:00


《1954년 사사오입 개헌, 1961년 5·16군사쿠데타와 69년 3선(選)개헌, 72년 유신헌법, 80년대 군부독재의 출현과 대통령단임제 개정, 87년 6·10항쟁과 대통령직선제 개헌…. 대한민국 헌법은 민주화과정에서 수차례 성장통을 겪었다. 한국사회는 그때마다 위기를 극복하고 ‘헌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향해 한걸음씩 힘겹게 전진해왔다. 최근에는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로 헌법의 존재와 중요성이 다시 한번 부각됐다.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연세대 김종철 교수(38·법학)가 빈지은(24·연세대 법학과 4년) 김수연씨(20·고려대 언론학부 1년)와 채승석군(16·서울 청담고 2년) 등 젊은이들을 만나 ‘헌법이 지배하는 사회’의 의미를 짚어보았다. 》

○ 헌법은 시민사회의 종교

▽채승석=헌법은 학생들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교칙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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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지은=봉건사회에서는 군주의 말 한 마디에 인간의 목숨이 좌우됐습니다. 헌법은 이에 맞서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찾기 위한 역사적, 철학적 투쟁의 산물이라고 생각해요.

▽김종철 교수=교칙은 학교라는 작은 공동체를 규율하지만 헌법은 국가라는 큰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는 기본법입니다. 국민의 자유와 인권은 무엇이고, 어떤 경우에 이를 제한할 수 있는지를 법으로 정하는 겁니다. 어떤 행위를 할 때 어떤 규제를 받을 수 있다고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국민들이 안정적 생활을 할 수 있는 거죠. 민주화가 발달한 서구사회에서는 헌법을 일종의 ‘시민종교’로 보지요. 신을 믿고 복종하듯이 헌법을 신뢰한다는 거죠. 민주화와 자유화도 법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어요.

▽채=영화 ‘실미도’를 보면 국가의 명령이라는 이유만으로 국민을 비인간적 ‘살인 기계’로 만들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북한과 관계가 좋아졌다고 이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리죠. 헌법에 따라 성립된 국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김 교수=영화적 설정이 개입되기는 했지만 냉전시대에 분단 이데올로기를 악용했던 극단적 국가 폭력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어요. 헌법이 제 기능을 다할 때 국가권력의 남용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 헌법이 지배하는 사회와 그 적들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 심판’이 진행 중인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연세대 김종철 교수와 신세대 젊은이들이 만나 ‘헌법이 지배하는 사회’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왼쪽부터 김수연 빈지은씨, 김종철 교수, 채승석군. -권주훈기자

▽김 교수=‘헌법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란 헌법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사회를 말합니다. 헌법이 무제한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죠. 질서를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주고 법의 테두리 내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해요. 법에 의한 규제를 받기 때문에 쉽게 승복할 수 있고, 부당하게 대우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거죠.

▽빈=그렇지만 민주화 경험이 짧다보니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등을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아직 남아 있어요. 학교에서 시위가 있을 때 전경들이 기숙사 문을 막고 검문을 한 일이 있었어요. 불쾌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죠.

▽김 교수=1987년 민주화 이전 국가권력이 헌법을 무시하고 힘에 의한 지배를 했기 때문에 국민의식 속에 ‘법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법을 이용한 억압’이라는 인식이 내재돼 있습니다. 국민 참여가 제한된 상황에서 헌법이 만들어진 점도 원인이 될 수 있겠죠.

▽김수연=아이들은 무심코 접하는 TV뉴스 등을 통해 정치인들의 수뢰사건 등을 ‘간접 학습’합니다. 그렇게 자라 성인이 돼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그릇된 생각을 하게 돼요. 정직하되 가난한 아빠와 사기꾼인 부자 아빠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후자가 낫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조사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김 교수=권력을 갖거나 부를 축적한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이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인식이 법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공정한 법 집행은 법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키고, 헌법에 의한 지배를 가능하게 해주는 열쇠입니다.

○ 헌법이 지배하는 사회로 가는 길

▽채=어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교칙을 안 지키면 벌점을 주고 내신에 반영해 불이익을 준다고 해요.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김 교수=그렇게 생각하는 건 교칙 제정과정에 학생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교칙과 달리 헌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법 제정 과정에 국민의 참여가 필수적입니다.

▽빈=법은 안 먹고는 살 수 없는 ‘밥’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우리가 스스로 법을 만들어나간다는 참여의식은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헌법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인데도 말이죠.

▽김=법을 지켜야 이익을 얻는다는 공감을 모두 나눠 가질 수 있으면 좋겠어요. 또 사회의 발전 속도나 방향에 맞춰 헌법 해석의 전향적인 변화가 이뤄질 수 있도록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채=주변에서 벌어지는 정치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무관심할 게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의사표현을 제대로 해야 모두가 편안한 세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리=박 용기자 parky@donga.com

▼헌법에 관한 책과 영화들

●책

▽이카루스의 날개로 태양을 향해 날다(안경환·효형출판)=영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들여다본 법의 세계.

▽원만한 자 원칙을 꿈꾸라(최대권·철학과 현실사)=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향해 원로 헌법학자가 던지는 메시지.

▽선비의 붓, 명인의 칼(정종섭·자유문화사)=글과 전각을 통해 헌법이 지배하는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풀어쓴 글.

▽한국적 헌법문화(권영성·법문사)=유신체제 종말 이후 한국 현대사의 각 시기를 헌법 문화라는 틀로 들여다 본 원로 헌법학자의 글.

▽법은 누구 편인가(러셀 갤로웨이·교육과학사)=미국 연방대법원이 경제적 약자에게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알기 쉽게 정리.

▽헌법이야기(한상범·현암사)=일반인을 위해 풀어 쓴 헌법 입문서.

▽한국입헌주의의 정착을 위하여(김철수·법서출판사)=헌법학자가 풀어 쓴 헌법과 정치에 관한 시사 분석.

▽법학일반론(한양대학교 법학연구소·한양대출판부)=일반인을 위한 법학 개론서.

●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감독 프랭크 카프라)=순수한 시골 청년의 중앙 정치무대 진출기. 갖은 권모술수를 뿌리치고 헌법이 지향하는 민주와 자유의 진정한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을 묘사.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감독 토니 스콧)=‘국민의 안전 보장’을 명분으로 자행되는 국가 폭력을 고발. 국가의 존재 이유를 되새길 수 있다.

▽실미도(감독 강우석)=북파 공작원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설정을 통해 분단과 냉전 이데올로기에 갇힌 국가권력의 비인간성을 표현. (추천:김종철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