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 동숭아트센터
일본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작품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오프닝 신으로 시작되는 영화 ‘우나기’에서 주연 배우 야쿠쇼 고지는 바람난 아내를 무참하게 살해하는 남편 역으로 나온다.
영화가 시작되면 그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어둑어둑한 시골 길을 따라 자전거 페달을 힘겹게 밟는다. 평화롭고 조용한 새벽길. 마치 남들보다 힘겨운 일을 한발 앞서 시작하는 노동자가 출근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윽고 그가 도착하는 곳이 경찰서라는 사실에 의아해진다. 그리고 경찰서 형광등 불빛 아래 노출된 이 남자가 온통 피 칠갑한 상태임을 보고 영화 속 경찰들보다 관객들이 먼저 경악한다. 야쿠쇼는 그가 평소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 아주 조용하고 부드럽게 이렇게 얘기한다.
‘방금 전에 아내를 죽였습니다.’
이마무라 감독의 영화에 출연할 때면 야쿠쇼는 극중 캐릭터의 변화를 가장 극심하게 겪는다. ‘우나기’에서 그는 여자 때문에 살인자가 됐다가 여자 때문에 (새로운 삶의) 구원자가 된다. 이마무라 감독의 2001년 작품으로 뒤늦게 국내에 개봉되는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에서도 마찬가지다.
야쿠쇼는 안성기처럼 ‘젠틀하고 나이스’한 국민배우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영화 내내 섹스를 할 때마다 ‘붉은 두 다리’ 사이로 ‘따뜻한 물’을 펑펑 쏟아내는 한 여인과의 열정적인 섹스 신을 벌인다. 그런데 이 장면은 이렇게 글로 표현하거나 말로 전달할 때는 은근히 야할 것 같지만 영화를 보면 그렇게 우스꽝스러울 수가 없다. 그리고 묘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그래서 매우 ‘건전하게’ 이런 상상을 하게 된다. 저 남자 야쿠쇼 코지, 기분이 과연 어떨까?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동아일보 자료사진
국내에 개봉된 일련의 작품들, 그러니까 ‘나라야마 부시코’에서 ‘우나기’ ‘간장선생’, 그리고 이번 영화 ‘붉은 다리…’까지 이마무라 감독의 영화적 사상은 일관된다.
지금의 이 모순되고 황폐한 세상은 원초적 생명력을 지닌 여성성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일본 내에서도 보기 드문 이 페미니스트 노감독은 그러나 자신의 여성주의적 시각을 이론의 도그마에 가둬 놓지 않는 지혜로움을 갖고 있다. 여든에 가까운 고령의 나이가 암시하듯 이마무라 감독의 여성주의는 삶과 죽음을 담담하게 아우르는 관조의 미학에 의해 따뜻한 인간의 냄새를 풍긴다.
게다가 중간 중간 그의 화법은 폭소를 참지 못하게 할 만큼 유머러스한 구석이 있다. 마치 이마무라 감독은 젊은 관객들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사람들아, 내가 인생을 좀 살아봐서 알아. 인생을 그렇게 어렵고 심각하게만 받아들이지 말라고. 마음속에서 느끼는 욕망과 열정을 거부하지 마!’
얘기가 좀 비켜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박찬욱 감독이 자신의 네 번째 작품 제목을 이마무라 감독의 1979년 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 그대로 빌려 온 이유는 단순히 그 어감이 주는 느낌 때문만이 아니다. 박 감독은 거장에게서 인생의 잔혹함이 빚어내는 아이러니와 유머도 슬쩍 가져왔다.
때늦은 신작 ‘붉은 다리…’는 야쿠쇼가 풍겨 내는 인간적 매력을 다시 한번 맛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쳇말로 ‘강추’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그만큼 일본을 넘어 한국에 이르기까지 비루하고 찌든 일상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현대인의 아픈 가슴을 표정으로 담아내는 배우는 드물다.
영화 속 야쿠쇼 처럼 우리 역시 피곤한 삶을 이어가지만 이상하게도 그와 함께 있는 두 시간은 그렇게 편안하고 따뜻할 수가 없다. 많은 사람이 야쿠쇼를 좋아하는 이유다. 30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가.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