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한국화약이 화약 제조에 성공하면서 화약 부족 사태는 해결됐다. 1956년 한국화약 기술자들이 화약을 제조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 한국화약
▼광산용 화약 總品切…重要鑛은 마비상태 陷入▼
광산용 火藥의 품절로 말미암아 국내 중요 탄광 및 광산은 총마비 상태에 빠지고 있어 동 화약 확보에 대한 시급한 조처가 요청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광산용 화약 연간 수요량은 七백톤에 달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국내생산은 전무한 형편으로 오직 일본에 의존하여 왔었는데 작년 八월 二백톤을 도입한 이후로는 정부에서 이의 도입을 허가치 않은 관계로 이미 재고량이 두절되어 寧越, 恩城 탄광은 수일 전부터 작업을 중지하고 있으며 和順 탄광도 수일 내로 작업을 중지하지 않을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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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부에서는 앞서 일본으로부터 二십만 불의 화약을 도입할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대통령으로부터 앞으로 화약 공급은 국내생산으로 충당할 것과 만일 불가피한 경우에는 일본은 제외한 기타 지역으로부터 도입하라는 유시로 동 계획은 좌절되었던 것이다.
▼이승만 "일제 화약 쓰지말라" 호통▼
무기용 화약은 미군이 쓰다 남은 물량으로 충당했고 광산 채굴, 도로 교량 건설 등에 필요한 산업용 화약은 아사히가세이(旭化成) 등 일본 업체에서 전량 수입해 쓰던 시절이었다. 화약 생산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1954년 1월 화약을 ‘수입대체 산업’으로 지정하고, 특히 일본에서의 수입은 전면 금지토록 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이에 따라 화약 수입량의 60∼70%를 소비하던 중석, 석탄 채굴업체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 때문이었다. 이 대통령은 당시 강성태 상공부 장관을 불러 “아직 일본 사람이 만든 화약을 쓰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 아니냐”며 “독립국가에는 화약공장이 있어야 한다. 화약은 국력과 비례한다”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일제는 한반도에 조선질소화약, 조선유지 등 4개의 화약공장을 세웠다. 이런 기반시설에도 불구하고 광복 후 우리가 화약을 만들 수 없었던 것은 일본이 화약제조 기술을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 게다가 4개 공장 중 남한엔 조선유지 1개뿐이었다.
당시 상공부는 듀폰 등 미국업체에서 50만달러어치의 화약을 긴급 수입하는 등 수입처 다변화와 함께 국산화에 박차를 가했다. 정부로부터 조선유지 공장을 불하받은 한국화약이 1956년 초안(硝安)화약을 개발한 데 이어 1958년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화약부족 사태는 숨통이 트였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