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대의 정치 실험.’
벨기에 브뤼셀 유럽연합(EU)본부에서 만난 관계자들은 다음달 1일의 EU 확대를 이렇게 표현했다.
‘인류 최대의 경제 실험’으로 불린 유로화 도입에 성공한 EU가 한꺼번에 10개국, 8000만명을 새로 받아들이는 실험을 감행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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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 1일 새로 EU 회원국이 되는 나라는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키프로스 몰타 등 중·동유럽 국가들.
이들의 가입으로 EU는 회원국 25개, 인구 4억5000만명으로 팽창한다. ‘정치 빅뱅’이자 역사상 최대 국가연합의 탄생이다. 2차대전 이후 동서로 분열됐던 유럽은 이제 EU라는 하나의 지붕 아래 들어가게 됐다.
▽국제정치 영향력 증대=확대된 EU는 외형만으로도 국제정치 역학 구도에서 막강한 파워를 갖게 된다. 25개 회원국이 결속하기에 따라서는 현존 유일의 ‘슈퍼 파워’ 미국과도 어깨를 견줄 수 있다.
EU본부에서 만난 엠마 우드윈 외교담당 집행위원 대변인은 “앞으로는 미국의 ‘하드 파워’보다 EU의 ‘소프트 파워’가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럽 내로 눈을 돌리면 ‘전쟁과 갈등의 역사로 점철된 유럽 국가들을 한배에 태움으로써 전쟁 재발을 방지한다’는 유럽통합 운동의 이상에 한발 더 접근하게 됐다. 중·동유럽 신규 가입국은 서유럽의 민주주의와 정치안정을 직수입할 기회를 얻었다.
▽경제 ‘업그레이드’=경제적 파급효과는 더 크다. EU는 이제 미국과 비슷한 경제규모를 갖게 됐다. 회원국들은 단일시장 출범으로 투자와 고용 창출 효과를 누리게 됐다.
특히 신규 회원국은 경제를 일거에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새 회원국은 현행 관세동맹(Customs Union)에 자동 편입돼 관세인하 혜택을 받는다. 올해부터 6년간 405억유로(약 56조7000억원)의 재정지원도 받는다.
▽유로화 약진=EU 경제사회이사회(ECOFIN) 라인하르트 펠케 과장은 “유로화 사용 가능지역이 넓어지면서 제2의 기축통화로서 유로화의 위상과 힘도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규 가입국이 당장 유로화 체제에 편입되는 것은 아니다. 유로화 체제에 들어가려면 재정, 환율, 금리 안정 등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펠케 과장은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여러 경제지표를 볼 때 에스토니아가 가장 빨리 유로화 체제에 가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30개국+α’=동유럽 최빈국으로 꼽히는 불가리아, 루마니아는 이번 가입에서 제외됐다. 두 나라는 2007년에나 가입이 가능하다. 인권문제 등으로 발목이 잡힌 터키는 내년 1월부터 EU와 가입협상을 재개한다.
EU 집행위 클로드 보슈 대외관계담당관은 “2010년에 ‘큰 덩어리’인 터키가, 장기적으로는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도 회원국이 될 것”이라며 “결국 EU 회원국의 최종 규모는 30개국+α”라고 내다봤다.
장 크리스토프 필로리 확대담당 집행위원 대변인은 “러시아도 EU 가입을 원하지만 러시아의 가입은 복잡한 문제”라고 말했다.
▽‘법 없는 동거’=이번 확대는 심각한 절차상 하자를 안고 있다. 회원국들이 아직도 EU 헌법안에 합의하지 못한 것. 한 울타리 안에 살게 됐는데 서로를 규제할 룰은 갖추지 못한 셈이다.
합의 실패의 주범은 EU의 의사결정 방식. EU 헌법 초안은 확대 이후 의사결정 방식으로 ‘25개 회원국 과반수 찬성에, 찬성국 인구가 전체 EU 인구의 60%를 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른바 ‘이중다수결’ 제도.
자연히 독일(8000만명), 프랑스(6000만명) 등 인구가 많은 나라의 영향력이 커진다. 이 때문에 스페인(3950만명)과 폴란드(3800만명)는 거부했다.
그러나 최근 스페인 정권교체로 집권한 사회노동당 정부는 “헌법안 반대를 재검토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폴란드도 ‘재고’를 약속했다. EU 헌법 태스크포스의 스티븐 베르윌겐 위원은 “올 상반기 중 헌법안 채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가난한 신입생들’=다른 문제는 현 회원국과 새 회원국의 경제격차. 중·동유럽 신규 회원국의 평균 국내총생산(GDP)은 EU 평균의 40%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격차를 어떤 속도로 메워 나가느냐가 확대의 성패를 가르는 관건이다.
기존 회원국들은 중·동유럽과의 담장이 허물어지면 불법이민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서유럽 우파 정당들은 벌써 “왜 우리 세금으로 가난한 이웃을 먹여 살려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브뤼셀=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