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그림은 생명체와 같아서 자신의 삶을 산다….’
현대회화의 거장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바로 그러하다. 나치 독일의 살육(殺戮)을 고발한 작품은 스페인내전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마을’(루소)에서 일어난 전쟁의 비극을 불러낸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북부 바스크지방의 ‘하늘이 노출된’ 도시 게르니카.
나치 독일의 최정예 ‘콘도르 폭격기’ 43대가 4시간에 걸쳐 50t의 폭탄을 쏟아 부었다. 극우 파시스트 프랑코를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폭격으로 전체 주민의 3분의 1에 이르는 1500여명이 숨졌다.
조국의 비보(悲報)를 접한 피카소는 미친 듯이 붓을 놀렸다. 죽은 아이를 부여안고 울부짖는 여인, 창에 찔려 날뛰는 말, 부러진 칼…. 현실세계가 갈가리 찢겨나간 큐비즘의 ‘4차원 공간’에 그 처절한 참상을 담았다. “게르니카 앞에서는 아무도 입을 떼지 않는다. 그저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다. 고통은 그 한계를 넘으면 도무지 표현할 수가 없다.”
‘게르니카 폭격’은 이후 전쟁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더 이상 후방도 없고, 더 이상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 맹목성(盲目性)은 가히 ‘공습테러’(뉴욕타임스)라 할 만했다.
공습테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수시로 출몰한다. 독일의 런던 대공습과 독일 산업도시에 대한 연합군의 파상공습이 그러했고, 중일전쟁 때 일본의 ‘난징학살’이 그러했다. 그 일본에 대한 원폭투하는 극단적인 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미국은 또 어떠했는가.
미국은 오폭(誤爆)에 따른 민간인 희생을 “부수적인 피해”라고 변명했지만 1995년 오클라호마 미 연방청사를 폭파한 티모시 맥베이도 어린이들이 죽은 것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
20세기 전쟁의 이 새로운 야만성은 한반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의 재앙에 유난히 민감했던 피카소는 6·25전쟁을 소재로 ‘한국에서의 학살’(1951년)을 그렸다.
그의 반미적(反美的) 성향 때문이었을까. 작품에서 기계 같은 느낌을 주는 중무장한 군인들은 다름 아닌, 미군이었으니!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